소박한 다짐들의 모임
해가 바뀔 때 즈음 내년 다이어리들이 서점 한 편에 자리 잡는다.
그 무렵 나는 잊고 있었던 버킷리스트를 떠올린다.
올해의 버킷리스트를 얼마나 이루었나
또 내년에 내가 이루고 싶은 일들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한다.
최근 몇 년 간 나는 버킷리스트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굳이 버킷리스트를 적을 수 있는 다이어리를 사거나 다이어리 뒷편 모눈종이에 버킷리스트를 빼곡하게 적어내려가는 사람이었다. 리스트들 중에는 대체로 연말에 가서는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이룰 수 있었을 리스트들이 많이 보인다. 원래도 내가 그렇게 허황된 사람은 아니라서 이루지 못할 거 같은 목표는 애초에 세우지도 않는다.
하지만 생각은 늘 실천을 앞서나가고, 이 정도는 문제 없지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실제로는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던 것도 나름 많다. 또 무슨 이런 사소한 거를 가지고 버킷리스트로 적었나 싶은 귀여운 리스트도 보인다. 그래도 이 중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언제나 이룰 수 있는 리스트 혹은 이루려면 좀 걸릴 거 같은 리스트 이런 것 말고 내가 꾸준히 마음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 노력해왔던 리스트이다.
대표적인 나의 버킷리스트로 꼽을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브런치 작가되기'이다. 브런치는 지난 몇 년 간 내 버킷리스트 단골주제였다. 늘 부담없이 글 쓰는 것은 좋아하지만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나니 더욱 더 만반의 준비를 해내야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면 정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냐하면 또 그건 아닌 것이다. 그저 만반의 준비를 해야할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주에 한번, 달에 한번 글을 쓰겠다는 그런 다짐이 그저 의무로만 느껴지고 실제로 마음이 움직여 거침없이 글을 써내려가지는 못 하였다.
그렇다면 한 해를 돌아봤을 때 정말 이룬 거 없이 그저 흘러보내기만 했을 뿐일까?
사실 열두 달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어서 연초에 새운 버킷리스트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기까지 나름 충분한 시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게 세운 새로운 목표를 실현하기에도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다. 그래서 버킷리스트에서 계획하지 않았던 보람찬 일들이 꽤 많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상하지 못 했던 기쁜 일을 이뤘다고 해서 달성하지 못 한 버킷리스트가 상쇄되지는 않는다. 버킷리스트에 대한 강박은 내가 리스트를 쓰지 않는 이상 계속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강박을 바탕으로 하여 목표에 대한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어떤 목표는 한 해로 부족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해의 실패를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생각될지는 모르겠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가 했던 모든 시도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기반이 되어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기개발서에서 혹은 유튜브에서 많은 이들은 말한다. '구체적인 수치로 목표를 세우라'고.
예를 든다면, '내 집 마련하기'처럼 두루뭉슬한 목표가 아닌 '10년 내에 서울 어디어디에 위치한 공시 가격 10억짜리 아파트를 마련하기'처럼 뚜렷하게 수치화할 수 있는 목표 말이다. 사실 나는 서울 어디어디에 10억짜리 아파트가 있는지, 아니 사실 아파트의 공시 가격이 10억이 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 모르는 동시에 별 관심이 없다.
언제 한번 좋은 기회가 있어서 버킷리스트 100개를 세워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기가 막히게 나에게 버킷리스트 숙제를 내준 사람도 구체적인 수치로 리스트를 적어보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동안 버킷리스틀 헛되게 써오고 있었다..) 굳이 꾸며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100가지의 리스트는 크게 어렵지 않게 적을 수 있었다. 4페이지 분량의 리스트를 1번부터 100번부터 읽어 보니 모두 지금이라도 무리한다면 이룰 수 있는 혹은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리스트는 없었다. 다른 사람의 리스트를 읽고 내 것을 읽어 보니 그렇게 소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나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원래부터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취직 이후부터 였을까. 아니면 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부터 였을까. 아니면 더 오래 전, 학급 석차가 매 시험마다 매겨져 나올 때부터 였을까.
언제부터인가 삶에서 만족하는 법을 모르고 살아왔던 것 같다.
수동적으로 적어내려갔던 버킷리스트 100개가 나의 정체성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나를 바꿨던 것은 하나의 굳은 다짐이 아닌 대단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다짐들이 모임이었다.
굉장한 하루 하나가 나를 바꾼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았던 하루하루가 모여서 나를 점차 바꿔나갔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굉장한 하나의 성취에만 집중하기보다 너가 매일을 살아가며 하는 다짐과 실천에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해보자.
모든 준비를 마치고 도전하는 일은 없다. 이제 곧 돌아올 버킷리스트는 결과 하나가 아닌 결과를 이루는 과정에 조금 더 집중해 보면 어떨까 싶다. 결과를 이루기 위해 해야할 밑준비들을 적는다면 성취감에 목말라 자책하고 있는 내 자신에게 감히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루었다며 밑줄 두 개를 긋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