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IRATION
미뤄두었던 대청소를 한다. 토요일 일찍이 청소를 하고, 일요일에는 빈둥빈둥 독서도 하고 향기도 맡자고 생각했지만, 청소가 시작된 건 일요일 늦은 오전이었다. 금요일 저녁부터 속절없이 밀려온 졸음을 이길 도리가 없었던 탓이다.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닌데 그랬다. 청소가 급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쏟아지는 잠을 어렵게 참아가며 꾸역꾸역 해낼 일도 아니었다.
흰 빨래를 긁어모아 표백제를 넣어 세탁을 시작하고, 화분을 화장실로 옮긴다. 몇 달 전만 해도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면 되던 일이 어느새 네다섯 번은 옮겨야 한다. ‘어쩌다 이리되었나…’ 쩝, 입을 다시며 샤워기를 얕게 틀어 인공 비를 만들어 준다. 이 잠깐의 시간이 너희를 키우는 가장 큰 낙임을 너희가 알까? 실없이 중얼거리고는 다시 나가 화분 받침을 치운다. 러그는 둘둘 말아 아껴둔 커다란 택배 봉투에 밀어 넣어 문 앞에 내어 둔다.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아직 본격적인 청소는 시작도 하지 않은 셈인데 벌써 좀 지친 기분이 든다. 청소기를 충전기에 꽂고는 잠시 휴식.
멍하니 앉아 습관처럼 세상의 향수들을 검색한다. 아직 기초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지만 그래도 조금 배웠다고 향료들을 보며 향을 상상할 수 있게 된 점이 나름대로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제 수준에서의 지적 허영심을 최대한으로 탐닉하는 셈이다.
문득 관심있던 조향사의 이름을 검색한다. 새로운 사이트가 생겨 꾹 눌러 접속해본다. 사이트에는 고작 서너 가지의 향수가 단출하게 업로드되어 있다. 클릭해 들어간 상세페이지에는 짤막한 수필이 적혀있다. 다른 향수를 선택해 본다. 또 다른 이야기. 그 향이 가진 이야기다. 모든 향수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진다. 마치 모든 신이 제 신화를 가진 것처럼. 보통 향수의 소개는 대부분 재료와 타입에 대한 상세를 풀어쓴 것에 불과했기에 나는 영화 같은 스토리를 가진 이 향수와, 수필에 매료되었다. 마음 한쪽에서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일렁인다. 나의 이야기를 짓고 싶다.
양질의 씨앗이 마음에 심겨 졌다. 아직은 건조한 땅에서 겨우 숨은 붙어있는지 막연할 뿐이지만, 그저 한쪽에 씨앗이 품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게는 언제든지 피워낼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 아주 작고 소박한 희망. 어느새 그 희망은 꿈틀 자라나 조그만 방을 만든다. 그 방 안에는 아끼는 향료들이 가득하고, 그 앞에 앉아 나만의 이야기를 끼적이는 모습. 어쩌면, 어쩌면 그것들은 작은 신화로 키워질 수 있을지 모른다.
고개를 돌려 방안을 둘러본다. 치우다 만 집안은 어쩐지 치우기 전보다 더 어수선한 모양이다. 지금 어지럽다고 해서 시작을 후회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엔 잘 마무리 지어야만 원하는 모습으로 남을 수 있다.
8년간의 방황이 있었다. 그건 여러 도전이기도 했고, 쉬운 포기이기도 했고, 다양한 경험이기도 했다. 세상의 눈에는 자주 한심했고, 나는 제법 행복한 얼굴이었다. 더는 행복하지 않은 얼굴로 어딘가에 꽁꽁 묶인 듯 몸부림치며 보낸 지난 1년을 회상한다. 어쩌면 나의 불행은 안주였는지도 모른다. 편안함 속에서 안주하자 나는 조그만 희망을 품을 기운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필요한 건 아마도 끈기. 꽁꽁 묶인 채로 꾸준함을 공부하며, 혹은 연기하며 얻은 그 끈기를 양분으로 삼아, 나는 그 방으로 들어가야겠다.
그 작은 씨앗은.
그 방 안에는.
나를 살게 하는 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