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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윤 Dec 10. 2022

이태리 옥수수 죽, 이렇게 맛있다?

이탈리아 옥수수 죽 뽈렌따(Polenta)

할머니는 옥수수를 참 좋아하셨어요. 멀리 멀리 시골 장에 갔다 돌아오실 땐 꼭 보랏빛, 붉은 빛이 도는 한 뼘보다 작은 옥수수를 사 오셨지요. 엄마는 할머니가 사오신 옥수수를 찜통에 넣고 김이 푹푹 올라오게 찌셨죠. 그러면 저는 찜통 앞에서 기다렸다 옥수수가 한김 식히기도 전에 '앗 뜨거, 앗 뜨거' 하며 옥수수 껍질과 수염을 떼어내고는, 앞니로 조금씩 갉아 먹었지요. 그 작은 옥수수는 요즘 팝콘이나 만드는 종자가 개량된 커다랗고 샛노란 옥수수보다 맛이 은근하니 더 달고 찰기가 있었어요. 할머니는 옥수수를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여름 옥수수 철이 되면 집에는 찰강냉이 떨어지는 날이 없었답니다. "할머니, 옥수수가 그렇게 맛있어요?" "하모, 맛있제." 얼마나 맛있으신지 옆에 있는 손주들에게 어디 하나 먹어 볼테냐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야무지게 드셨지요.


어릴 땐 옥수수가 그렇게 맛있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이 먼 땅 이탈리아에 와 보니 옥수수가 참 맛있읍디다. 옥수수의 맛에 눈을 떠 버렸어요. "응? 이게 뭐야?" 하고 눈이 번쩍 떠지는 맛이었다면 믿으시겠어요? "옥수수가 다 옥수수지, 무슨 눈이 번쩍 떠지는 맛이야?" 하실 겁니다.


그 눈이 번쩍 떠지는 옥수수 요리는 바로 ‘옥수수 죽’이랍니다. 엥? 옥수수 하면 북한에서 죽지 못 해 먹는다는, 배를 채우려고 먹는 '강냉이 죽' 아니던가요? 하지만 배를 채우려고 먹는다는 그 옥수수 죽, 맛이 없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때는 2016 한겨울이었나봅니다. 눈이 펄펄 내리는  친구와 함께 토리노에서  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비엘라(Biella) 있는 산투아리오  오로 (Santuario di Oropa) 갔어요. 함박눈은 펑펑 쏟아지고, 온 세상은 환하게 하얀 캔버슨데, 눈이  뜨이게 시원할 정도로 반듯하고 커다랗게 지어진 대성당에 입이  벌어졌지요. 하지만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나요? 아무리 아름다운 성당도 배꼽 시계가 울려대고, 손발이 얼어 곱아 들어가니 "이제  봤다, 어서 가자"하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 고프지? 우리 뜨끈한 뽈렌따 먹으러 가자." "? 뽈렌따? 그게 뭐야?" " 보면 알아. 한겨울엔 뽈렌따가 최고야." 친구는 산투아리오 아래 아주 오래된  허름한 뜨라또리아(trattoria) 저를 이끌었어요. "일단   말고 맛을 보셔! 뽈렌따 콘챠 하나랑 뽈렌따  라구 하나 주세요."


곧 제 눈 앞에는 커다란 도자기 그릇에 어마무시한 양의 뽈렌따가 도착되었어요. 노란 옥수수 죽 위에 뭔가 거뭇거뭇한 점박이가 있었죠. '뭐야? 이 잡티는?' 생각했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버터를 살짜쿵 태우듯이 녹여 헤이즐넛 향이 나게 만든 '브라운 버터'였어요. 

(브라운 버터 이야기는 저의 글 '버터의 온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natalia0714som/159 ) 


친구는 뽈렌따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제 앞접시에 한 국자 푸짐하게 뽈렌따 콘챠를 퍼 줬어요. '어허~~~ 이거이거 저 축축 늘어지는 얇은 허연 실들, 치즈 아니던가요?' 네, 뽈렌따는 순수한 옥수수 가루에 물과 소금 그리고 약간의 올리브 오일을 넣고 바닥에 눌러 붙지 않게 한참을 불 앞에서 정성스럽고 은근하게 저어 만들지요. 그 뽈렌따가 거의 다 되어 갈 때 잘게 자른 치즈와 브라운 버터를 곁들여 만든 뽈렌따 콘챠(Polenta Concia)가 제 앞에 대령 되었던 거지요. 그러고보니 뽈렌따 콘챠가 맛있을 수 밖에 없군요. '치즈 버터 옥수수 죽'이라니! 생각해보니 반칙은 반칙이군요. 맛이 없을 래야 없을 수 없지요.


후후 불어 한 숟갈 떠 입에 넣으니 저도 모르게 "음~~~~~" 하는 감탄사가 자동 발사! 아! 이 슴슴하고 구수한 맛이라니! 뜨끈한 뽈렌따 콘챠 한 사발에 추위한 한꺼번에 날아가더군요.


'이제 배가 불러 더는 못 먹겠다' 하던 차에 '뽈렌따 알 라구(Polenta al ragu)' 도착! 뽈렌따 위에 토마토 소스를 넣은 고기 라구가 섹시하게 올라가 있었어요. 아~ 노란 뽈렌따와 새빨간 라구 소스의 영롱한 조화를 보라! 배가 부르든 말든, 그렇지요, 맛을 봐야지요. 구수한 옥수수 죽에 토마토를 넣어 느끼하지 않은 고기 소스가 척! 하고 올라갔으니 말이 필요 없지요. 옆의 테이블 할아버지는 또 다른 뽈렌따의 변주, 뽈렌따 위에 이탈리안 생소세지 살시챠를 익혀 올린 '뽈렌따 알라 살시챠(Polenta alla salsiccia)'를 흐뭇한 표정으로 드시더군요.

뜨끈한 겨울 음식들. 이탈리아 식 퐁듀 폰두따(Fonduta)와 뽈렌따 알라 살시차(Polenta alla salsiccia)

오늘, 한국에서 이 멀고 먼 이탈리아 북부 시골 마을에는 첫눈이 온다더니 눈 대신 진눈깨비가 휘날립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동화 속에 나오는 숲속에 사는 마녀처럼 불 위에 솥을 얹고 마법의 노란 가루를 넣고는 휘휘 젓고 있습니다.


"저도 그 뽈렌따 맛보고 싶은데요, 근데 전 여름에 이탈리아 갈 거에요. 그 유명한 뽈렌따 맛볼 수 없는 건가요?" 허허, 걱정 마세요. 우선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주(Piemonte)로 오시지요. 그리고 산으로 가세요. 프랑스와 가까운 피에몬테 주 산장으로 가시면 한여름에도 뽈렌따를 맛보실 수 있답니다.

피에몬테 주의 깊은 산속은 한여름에도 해만 살짜쿵 가려지면 으슬으슬 서늘한 기운이 돌거든요. 등산 후 허기진 뱃속을 달래주는 음식, 뽈렌따만한 게 없습니다.  


발도네끼아 산, 라고 베르데(Lago Verde)아래의 통창이 시원한 산장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뽈렌따를 기다리는 사람들

토리노(Torino) 뽀르따 누오바 역(Stazione Porta Nuova)에서 기차로도 갈 수 있는 발도네키아(Bardonecchia)로 가 볼까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또 '시장이 반찬' 아닙니까? 등산부터 하십시다. 호수 치고는 규모가 작지만 정말 눈을 의심할 정도로 초록초록 하는 푸른 호수 '라고 베르데(Lago Verde)'까지 등산을 하십시다. 그리고 배가 아주 출출해 져서 배꼽 시계가 발걸음을 재촉할 때,  호수 바로 아래 산장으로 갈까요?  공기 좋은 데 오셨으니 암요~ 테라스에 앉으셔야죠. "헉!" 소리 나오게 아름다운 산봉우리 보시면서, 또 한 번 "헉!" 소리 나오게 푸짐하게 나오는 뽈렌따에, 살짜쿵 시큼하고 또 살짜쿵 쿰쿰한 싸구려 하우스 와인 한 잔, "캬~!" 해 보십시다. 세상 시름 다~~~ 잊으실 겝니다.


정말로 초록초록한 라고 베르데(Lago Ver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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