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롭게 마주하는 세상
어느 순간부터 내게는 기억이라는 것이 아주 희미하게만 남아있었다. 아니 희미하다는 말조차도 거창한 수식어일지도 모르겠다. 기억의 일부는 왜곡되어 있거나 일부는 조각조각 나버려 이어 붙일 수 없거나 그것도 아니면 중간중간 끊어져서 사라져 버렸다. 내게 기억이란 그리고 내 삶이란 시간이 만들어주는 연속성을 갖지 못한 채,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점들처럼 불연속적으로 끊어져버렸다.
어느 봄날, 가만히 창 밖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일기를 써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를 쓰면 적어도 불연속적으로 떨어진 혹은 사라지는 기억은 없을 테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일기를 쓰는가 보다. 하지만 나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아는 나는, 일기를 쓴다 해도 얼마 못 가 다시 원점이 될 것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만약 내가 그토록 성실한 사람이었다면 내 기억이 사라질 일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한 포털사이트에서 작은 카메라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그리고 너무나도 작은, 한 손에 들어오는 그 카메라를 갖고 사진을 찍으면 좋겠다는, 그래서 그 사진들을 일기 대신 남기면 그 당시 내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적어도 잊는 일은 없을 테니 그 아니 좋겠는가. 그러지만 내게는 그 작은 플라스틱 카메라 하나를 새로 살 경제적 여유조차 없어서 한 중고 사이트에서 내가 수중에 갖고 있는 비상금 안에서 해결하고자 기다렸고, 끝내 모서리가 부서져 시세보다 저렴하게 나온 녀석을 받아 볼 수 있었다.
나는 녀석을 받아 들고 가까운 사진관에서 필름 한 롤을 구입하여 내가 가보고 싶었던 큰길 건너의 골목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나는 어릴 적의 나를 닮은 친구들을 만났고, 가로등을 보았으며, 내 감정이 고스란히 이입되는 자전거에 시선이 갔고, 그 짧은 여행의 끝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찰칵도 아닌 틱 소리와 함께 찍히는 작은 카메라로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같아만 보이던 지루한 일상도, 매일 새롭게 느껴지고 소중해졌다. 삶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영화 속 장면처럼 다가오고 내 정서도 조금씩 풍요러워졌다.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삶은, 매일은 다 같아 보이지만 의외로 색색이 다채롭고 아름다운 공간이라는 것을. 이 책의 사진들은 우리가 매일 보는 일상을 찍은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매 순간 반복되는 장면들이지만 조금만 다르게 보면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
나는 그것이면 내가 사진을 찍어온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전혀 아깝지 않을 것 같다. 부디, 이 짧은 책 속에서 다채로운 그래서 조금은 달라진 시선으로 세상을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2024년 3월 3일
글, 사진 HAR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