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7, 80년대 한국에서 목표지향적 삶을 살도록, 주입식으로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공부 열심히 해 유명한 대학 가기, 졸업 후엔 직장인이 되어 사회가 요구하는 사다리를 오르며 승승장구하는 삶.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이 한국 사회의 주입식 강요에 맞서 싸워야 했다.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해 중학생 때는 수요 명화, 고전 명화 등등 TV에서 하는 영화는 모두 보고 주말이면 친구와 영화를 보곤 했던 나는 미학을 공부해 평론가가 되리라 꿈꿨다. 당시에는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며 문과와 이과를 나누었는데 영화와 예술을 좋아한 나는 문과를 고집했고, 공부 잘하면 당연히 이과에 가야 한다는 담임선생님과 내가 의사가 되길 원한 엄마와 싸웠다.
고집이라면 뒤지지 않는 나는 결국 문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고3이 되어 그 싸움은 다시 이어졌다. 당시 무슨 인연인지 고1 때 담임선생님이 다시 담임이 되었는데 미학과를 지원하겠다는 내게 “넌 논리적 사고를 하는 아이라, 문과에선 법대나 경제, 경영학과에 가야지 인문학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다시 고집을 피워 미학과에 진학했으나, 대학 내내 방황했다. 되돌아보면, 그때가 내 인생에 목표를 이루고 난 후 방황한 첫 시기였지 않았나 싶다. 그 방황이 내가 나 자신을 잘 모르고 잘못된 학과를 택한 탓이었는지, 학생운동의 보루로 남아있던 미학과의 선배, 동기들과 마르크시즘과 유물론에 대항해 싸우다 지쳐서였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방황하며 패션디자이너가 될까 하는 꿈을 갖고 의류학과 수업도 수강하고, 민법, 형법 등 법대 수업도 듣고, 미시, 거시 등 경제학과 수업도 들었다. 미학 필수과목으로 수강한 서양철학 시간에 두툼한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교수님이 말했었다. “철학자는 나는 매와 같다. 내 말이 아니고 헤겔이 그렇게 말했다.” 금융과 회계는 사람들 숲의 가장 밑바닥을, 가장 자세히 볼 수 있는 곳인 듯했다. ‘그곳에서 나이 40이 될 때까지 열심히 일한 뒤에 나는 하늘을 나는 매처럼 자유롭게 살아야겠다’고 젊은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금융을 공부하기로 했다. 금융을 단시간에 공부하기 위한 목표로 회계사 시험도 치렀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온 후, 회계사 자격증을 가지고 Big 4에서 일한 경력과 대학원에서 금융공학을 전공한 것이 결합되어 세계은행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목표지향적 삶을 사는 궤도에 올라 가정과 일이라는 수레바퀴에 매인 채 열심히도 살았다. 나이 사십에 이르렀을 땐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와 직장이라는 일상을 깨고 젊은 시절 꿈꾸던 자유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사십 대 중반에 이르러 나는 김기택 시인의 <직선과 원>이라는 시를 읽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고, 젊은 시절 꿈을 수정해 50에 이르면 이 궤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리라 다시 꿈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십에 이르러 나는 내 목표를 이루었다. 아이들은 대학으로 떠나고 나는 직장을 떠나 자유로워진 삶.
하지만 그 목표를 이룬 후, 나는 방황의 시기를 지나게 되었다. 매해 목표가 주어지고 해마다 성과평가를 통해 그 목표가 달성되었는지, 끊임없이 또 다른 목표를 추구하며 살아온 수십 년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목표나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는 삶을 살리라 했었다. 그런 때 누군가 내게 말했다. “목표와 꿈의 차이를 아십니까? 목표는 ‘좋은 대학' ‘사장' ‘건물주' 같은 명사로 표현되지만 꿈은 동사로 표현됩니다. ‘사장이 되어 직원과 소비자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겠다'처럼요. 목표를 이룬 후에 꿈이 없으면 방황하게 돼요. 삶엔 꿈이 있어야 해요. 자신을 소속된 직장, 직책과 같은 명사가 아닌 동사로 표현해 보세요. 꿈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행위로, 동사로 표현되니까요.”
나를 동사로 표현하라? “나는 글을 씁니다. 글을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과거와 미래를 잇고, 떠나온 고국과 여행한 많은 곳과 정착한 이 나라의 사람들을 연계하고 싶습니다. 나는 텃밭 농사도 짓습니다. 산업화된 도시인의 삶에 자연을 담고 싶어서요. 또한 집 짓기를 좋아합니다. 건축은 영화만큼이나 종합예술인 데다 과학까지 더해져 흥미롭고, 순환하는 자연의 방식대로 사는 주거방식으로 바뀌어야만 멸망하는 지구를 막을 수 있으니까요…” 생각나는 동사가 너무 많다는 건,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많은 꿈을 꾼다는 것일 게다. 한 해가 연보랏빛 노을처럼 저물어가고 붉은 새로운 해가 떠오르길 기다리는 12월, 꿈꾸기에 딱 좋은 때가 아닌가.
미주 한국일보 2022.12.10일 자 주말에세이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