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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윤정 Oct 22. 2023

우연과 필연

최근 읽은 한 칼럼에서 “우리가 사는 지구는 절대로 특별하지도 않고 우주의 중심은 더욱 아니다. 억겁의 시간에 걸쳐 억겁의 우연이 겹친 결과”라고 썼다. 예전엔 신은 우리 인간을 특별히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지구가 특별하다 생각했지만, “무슨 힘으로 우주가 시작됐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우주의 나이는 약 138억 년 정도 되고 태양은 46억 살이다…. 아무리 살펴도 전혀 특별한 것이 없는 아주 평범한 행성이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라 한다. 

우연과 필연, 상대성과 절대성, 이 대칭되는 개념 속에서 현대인은 우연과 상대성을 강조한다. 근대 이전엔 절대자인 신과 신의 섭리인 필연을 믿었고, 근대에 들어 그런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후에도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절대적 힘과 필연성을 인정했다.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한 현대에 이르러서 모든 것이 우연이고 절대적 진리나 옳고 그름은 없고 모두 상대적이라고 외친다. 우주나 지구의 시간단위인 억년 단위로 보면 티끌보다 작은 점과 같은 시간인 50여 년의 내 삶을 돌아보면 삶은 우연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우연히 회계사가 됐고, 우연히 미국이라는 나라에 이민자가 되리라는 생각도 없이 와서 미국시민이 되었다.


“전 영문학 전공 중인데 졸업하고 뭘 할지 모르겠어요. 회계사가 될까 생각 중인데 직장생활이 어떤지 궁금해요.” 단발머리, 창백한 얼굴의 한 여학생이 물었다. 몇 해 전 서울대 학생들이 직장을 방문해 질의문답 시간을 가질 때였다. 많은 학생이 자신의 전공과 관계없는 분야의 직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그 여학생만 한 나이 때 미학을 전공하며 많은 방황을 했었다. 한동안은 패션디자이너가 되려 여름방학 때 양재학원에 가 옷 만드는 법을 배우고 의류학과 수업도 몇 과목 들었었다. 결국 그 일을 직업으로 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그때 배운 기술로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할로윈 옷도 만들고 집의 커튼도 만들곤 했다.

토피도 팩토리 아트센터 내 섬유예술 길드 회원 작품

패션디자이너의 꿈을 꾼 지 삼십 년이 지나, 나는 금융업에서 조기 은퇴하고 근처에서 운영되는 섬유예술 길드의 회원이 되었다. 올봄 알렉산드리아 토피도 팩토리(Torpedo Factory) 아트 센터에서 섬유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전시된 한 갤러리에 들어갔을 때였다. 뜨개질을 하던 한 흑인 중년 여인이 카운터에 앉아서 말을 건넸다. “한국인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예전에 미군에서 일해 한국에서 살았었어요.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세요?” 예전에 했었다는 내 대답에 그녀는 안내지를 건네며 말했다. “이곳은 섬유예술 길드의 회원들이 운영하는 곳이에요. 회원들끼리 가르쳐주기도 하고 외부 전문가와 워크숍도 해요. 관심 있으면 모임에 한번 와 보세요.”   


그렇게 나는 6월에 처음으로 그 길드의 모임에 가게 되었다. 봄날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즈음, 화창한 하늘과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20여 분을 운전해 갔다. 매달 둘째 토요일 오전 10시에 메릴랜드의 한 교회에서 만나 한 시간 정도 회원들의 정보교환 미팅을 한 후, 외부 전문가의 발표가 이어지고, 오후에는 세 시간 동안 미니 워크숍을 하는 수순이었다. 그날 외부 강사는 신디 그리젤다(Cindy Grisdela)로 즉흥적 퀼트(Improv Quilt)로 30여 년간 활동하며 명성을 쌓은 아티스트였다. 즉흥적 퀼트는 재즈처럼 정해진 패턴 없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녀의 퀼트는 추상화 그림을 보는 듯한데 강렬한 색의 조합뿐 아니라 아주 작은 조각천들을 활용한 것이 인상적이다. 한 작품을 설명하며, 그녀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아무리 작은 천 조각이라도 차마 버리지 못해요. 하루는 그런 조각을 모아 놓은 상자를 뒤집어 바닥에 흩어진 조각들을 퍼즐 맞추듯 디자인하게 된 작품입니다.”

아무리 작은 조각이라도 버리지 못한다는 그녀의 말에 “당신은 못 버리는 병이 있어"라고 남편이 내게 하는 말이 떠올랐다. 예전엔 안 입는 옷이나 아이들의 작아진 옷들을 기부했었는데 언젠가 그렇게 기부된 옷들이 그냥 버려져 쓰레기가 된다는 기사를 읽은 후 그냥 쌓아놓고 있다. 남편이 버리자고 할 때마다 나는 “시간 날 때 개조해서 쓸 거야!”하고 답한다. 천을 만들고, 재단해 옷을 만들고, 유통하고, 그 옷이 만들어져 내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고와 탄소배출을 했을 텐데,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의류 산업이 뿜어내는 연간 탄소 배출량이 전 세계 배출량의 10%를 차지한다. 이는 모든 국제선과 해상 운송의 배출량을 합친 것보다 많다. 또한, UN 보고에 따르면 패션 산업은 전 세계 폐수의 약 20%, 매년 바다로 흘러가는 미세 플라스틱의 9%를 차지한다.

그녀와의 미니 워크숍에서 시작한 조각천을 활용한 기하학적 디자인 퀼트를 집에 돌아와 계속했다. 패턴 없이, 무엇을 만들겠다는 명확한 용도도 없이 시작했지만 재봉틀로 박음질을 해가며 직사각형의 모형들이 만들어졌다.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뭘까? 첫 작품인데 너무 크거나 어렵지 않은 것으로 가방이 좋을 듯했다. 가방의 바닥과 끈엔 튼튼한 천이 필요해 아이들이 버려놓은 진바지를 꺼냈다. 몇 년 동안 버리라는 남편의 잔소리를 들으며 사수해 낸 것 중 하나였다. 그렇게 나의 첫 퀼트 가방이 완성되었다. 우연히 바느질을 다시 시작하고 별 계획 없이 만들기 시작했지만 아주 특별하고 멋진 가방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나의 첫 퀼트 가방

언젠가 우연히 책방에 들러 서서 읽게 된 글이 떠오른다. 내가 가장 즐겨보던 TV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Fixer Upper’의 여주인공 조앤나 개인즈 (Joanna Gaines)가 쓴 책이었다. 그녀는 방송계에서 일하리라는 꿈을 안고 대학 때 방송학과를 전공했지만 졸업 후 아무런 직장을 잡지 못해 낙오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연히 인테리어와 집을 개조하는 일을 하다 남편과 집을 개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그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다. 방송의 인기로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도 만들고 TV네트웤을 사서 독립적인 방송을 하게 된 후 펴낸 책이었다. “지나고 보니, 모두 우연이었던 것 같은 일들이 어떤 큰 뜻 아래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태어난 후, 부모님은 어느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가서 내 사주팔자를 물었다고 한다. 내가 미국으로 와 정착한 후, 나를 방문하실 때마다 엄마가 말했다. “그 점쟁이가 네가 커서 시집간 후에 멀리 보내고 항상 그리워할 거라고 했지. 그땐 속으로 ‘딸이야 커서 시집보내면 남의 자식이 되니 항상 그리워하는 건 당연하지' 했단다. 네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살게 된 후로 그 점쟁이가 한 말이 자꾸 생각난다.” 내 삶의 우연이라고 넘겨왔던 것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생각게 된다.   


짧은 시간 단위로 보면 즉흥이나 우연 같은 것도, 그러한 것들이 이어지면 특별한 것이 되고 필연으로 이어진다. 무언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거기에 쏟아부은 시간이다. 벌판에 흐드러진 많은 장미를 보고 실망한 어린 왕자에게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 속 여우가 말하지 않았던가. “네 장미가 네게 각별한 건 네가 쏟아부은 시간 때문"이라고. 자신이 떠나온 별의 유일한 장미가 매우 특별하다고 여겼다가 그저 평범한 장미였다는 사실에 어린 왕자는 눈물이 나도록 실망했다. 시간을 들여 서로 길들인 관계는 특별하고 책임이 따른다고 지혜로운 여우는 그런 어린 왕자에게 말해주었다. 신과 우주, 지구와 인간은 그렇게 많은 시간을 통해 길들여진 관계이다. 

우연으로 이어지는 시간은 어떤 원인에 의해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필연을 만들어 낸다.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고 해수가 상승하고 자연재해가 많아지는 것이 우연이라고 믿는 이도 있다. 80억 명의 인구가 우연히, 생각 없이 내다 버리는 것들이 이 지구를 파괴하게 되리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몇십억 년의 우연 같은 시간을 통해 이런 멋진 지구가 탄생했기에 우리는 더더욱 필연적으로 이 아파 신음하는 지구를 지켜내야 한다. 


자료> Microplastics from textiles: towards a circular economy for textiles in Eu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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