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다. 공동체나 한 사회, 국가도 마찬가지다. 역사에선 권력을 쥔 자들이 그런 자취가 기록으로 남지 못하도록 억압하고 기록된 것들은 지우려 애쓴다. 누군가의 상처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그 가해자의 치부를 들추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학교폭력을 다룬 넷플릭스 한국드라마 『더글로리』의 현실 속 인물인 표예림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뉴스를 지난 10월 10일 접했다. 너무 끔찍해서 나는 차마 볼 수 없었던 드라마였다. 12년간 당한 학교폭력 피해를 고발한 그녀는 그 드라마보다 더 심한 폭력을 견뎠다는데, 결국 27세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며칠 뒤, 나는 매달 둘째 주 토요일에 모이는 섬유예술길드 월례회에 갔다. 이달 모임의 외부강사는 시카고에서 온 퀼트 아티스트 데보라 펠(Deborah Fell)이었다. 백발의 머리를 늘어뜨린, 산타 할머니 같은 백인여성이었다. ‘지스 벤드 퀼트(Gee’s Bend Quilts)’ 그녀의 발표 제목이 커다란 스크린에 비쳤다. 자신의 생애와 경력을 드러내는 개인적인 사진 몇 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수십 년간 고등학교 선생을 하고 은퇴했어요. 그 후 예술학교와 퀼트를 배우러 다녔죠. 그러다가 앨라배마에 있는 반도, 지스 벤드에 가게 됐답니다.”
그녀는 그곳의 지도를 보여주며 놀라운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스 벤드는 조셉 지(Joseph Gee)라는 노예 소유자가 1816년에 700 에이커의 면적을 구입해 열일곱 명의 노예를 데리고 온 것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노예들은 이 지역에서 면화를 재배하고 수확해 흔히 옷과 침구류 등을 만드는 숙련된 사람들이었죠. 1930년대에 Gee’s Bend Farms, Inc.라는 협동조합 프로그램을 도입해 이 지역의 원주민과 흑인들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했고 그들은 계속 농사를 지으며 숙련된 기술로 퀼트를 만들었죠. 이 지역은 여전히 노예의 후손이 사는 극빈한 곳이었는데, 1965년에 처음으로 강 건너편 캠든(Camden) 지역에 투표를 하기 위해 등록을 하는 곳이 마련됐죠. 하지만, 그곳의 백인들은 지스 벤드의 흑인들이 투표등록을 못하도록 지스 벤드~캠든으로 운영해 오던 페리를 없애버렸어요. 강을 건너지 않고 육지로 갈 수 없는 것은 아니어도 한참을 돌아가야 하고 차로 갈 수밖에 없는데, 가난한 그들 중 차를 가진 이가 아무도 없었죠. 아직도 생존해 퀼트를 만드는 할머니 중 한 명은 그때 간신히 등록을 하러 갔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나중에 짧은 비디오로 보여드릴 거예요.”
그녀가 보여준 작품들 중 일부는 올봄 뉴욕의 휘트니뮤지엄에서 본 것도 있고,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아트갤러리에서 본 것들도 있었다. “색의 조합과 강약이 놀랍지 않나요? 작품의 사이즈도 어마어마하죠?” 이 런 놀라운 작품들이 1997년 역사학자이자 민속품 수집가인 윌리엄 아넷(William Arnett)이 700점을 구입해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며 아넷을 소개했다. “하지만, 그와 지스 벤드 퀼터와의 관계는 ‘Good, Bad, Ugly’였어요. 그가 계속해서 그들로부터 퀼트작품을 헐값에 사서 비싸게 팔고 막대한 이익을 챙겨, 지스 벤드 퀼터들은 아티스트 권리를 주장하며 2007년에 소송에 들어갔지요. 그 이듬해에 소송 당사자들과 합의해 판결에까지 이르진 않았지만 아티스트 권리를 인식시키고 법제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죠.”
이어서 그녀는 매리 페트웨이(Mary Pettway)의 증언비디오를 보여주었다. 한국의 위안부 증언 할머니처럼, 매리 페트웨이는 루시 밍고(Lucy Mingo) 등과 함께 생존해 흑인탄압시대를 증언하는 흑인 할머니다. 영상 속 음질이 좋지 않아 그녀는 통역을 하듯 말했다. “아이들까지 데리고 힘들게 투표등록을 하러 갔어요. 하지만, 그곳의 백인들은 페리를 없애면 절대 오지 못할 거라 예상했던 흑인이 나타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저희를 그곳 감옥에 가뒀지요. 아이들까지 모두 감옥에 넣고 감옥 안에 있던 매트리스마저 모두 거둬간 후 바닥에 쪼그리고 앉게 했어요.” 그녀는 계속해서 국립 린칭 메모리얼(National Lynching Memorial)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한국어로 마땅히 번역할 말을 찾을 수가 없는 ‘린칭'이란 단어는 목을 매달아 죽이는 것을 가리킨다. 수를 셀 수 없는 직사각의 철조물이 천정에 줄지어 매달려있는 사진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을지 짐작케 했다.
몇 해 전 읽었던 율라 비스(Eula Biss)의 에세이 「시공을 너머(Time and Distance Overcome)」가 떠올랐다. 미국에서 전신주가 흑인을 린칭 하는데 어떻게 쓰였는지 보였 준 글이다. 처음 전화가 발명되고 전신주가 세워진 후 미국인들은 그것이 보기 흉측하다고 보이는 대로 톱으로 잘라내버렸다 한다. 1889년 뉴욕타임즈에서 「전신주와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 만큼 싫어했던 백인들은 전신주가 흑인들을 린칭 하기에 좋다는 걸 안 후 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냥 목을 매달아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전신주에 묶어 불에 태워 죽이기도 하고, 몸에 총을 쏘아댄 후 매달기도 하고, 매단 후 사지를 자르기도 하고, 불에 태운 후 매달기도 하고, 텍사스에서는 그렇게 불에 태워 매달아 죽인 후 사진을 찍어 엽서로 만들어 “이것이 어젯밤에 우리가 만든 바비큐”라고 쓰기도 했다.
때때로 여전히 흑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듣기도 한다. 어떤 이는 그들이 게을러서 가난하다고 하기도 하고, 길에서 이유 없이 누군가를 칼로 찌르거나 폭행하는 흑인이나 집단으로 가게를 터는 흑인을 보고 근본적으로 그들의 문제라고 치부한다. 가해자들은 물리적 상처가 아문 뒤에도 파괴된 심령은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파괴된 심령은 평생을 가고 세대를 거쳐 이어진다. 진정한 치유는 가해자가 진정한 용서를 빌고 피해자가 그 용서를 받아들일 때에만 시작될 수 있다.
섬유예술 길드의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유서에 “제 사건을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남겼다는 표예림을 생각했다. 미국에서는 피부색으로,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런 폭력을 용납했는데, 한국에서는 무슨 이유로 그런 학교폭력이 현존하는가.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라고 호통치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어른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푸른 가을 하늘을 보며 고인이 된 그녀의 혼을 위해 기도한다. 또다시 그녀와 같은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모두가 그녀의 아픔을 기억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앨라배마의 지스 벤드에서 캠든을 잇는 페리는 2006년에 복원됐다 한다. 국립 린칭 메모리얼은 2018년에 세워졌다. 상처의 기록이 허용되고 치유의 역사가 21세기에 들어서야 시작된 것이다. 무엇이든지 빨리빨리 이루어내는 한국은 상처받은 이들을 잊지 말고 기록하고 그 치유를 속히 이루어내길 빈다.
(2023년 10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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