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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한송이 May 26. 2023

깨진 유리 조각 중에서

12화

유리를 쉽게 깨려면 정 가운데가 아니라, 모서리 부분을 쳐야 한다. 그래야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깨뜨릴 수 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가장 멀리 있는 사람부터 차근차근 잘라내면 타깃은 순식간에 고립되고 만다. 주변이 산산조각 나고, 자기 혼자 남게 될 테니까. 내 삶도 그런 줄만 알았다.


상사는 같은 파트끼리만의 단합을 원했다. 같은 프로젝트 팀원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다른 팀원과 어울린다는 이유로 면담을 해야 했으니 말 다했지. 나한테만 뭐라 하면 괜찮은데 다른 팀원에게도 영향이 가는 것 같아서 단독 행동을 1년간 지속했다. 혼밥, 혼술 등이 편한 성격이라 문제 되지 않았던 게 문제였는지, 결국 쫓겨났다. 부당하다고 소리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냥 고립되는 편이 쉬웠으니까.


하지만 내 유리는 생각보다 견고했다. 퇴사 소식에 동료들이 눈치 보지 않고 나를 데리고 나가 커피를 사줬다. 밥을 먹이고, 술잔을 기울였다. 오롯이 혼자일 줄 알았던 내게 사람이 모이니 일부는 불안했던 모양인지 썩 치졸한 대응을 일삼았지만 괜찮았다. 날 챙기는 동료들-개중에는 생전 대화 한 번 안 해본 사람들도 있었다-과 사과하는 선임 외에도 내 잘못 없다며 역정을 내는 친구들과, 이참에 좀 쉬라며 여유를 준 가족들이 있었다.


그렇게 잠깐의 휴식기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뭘 하고 싶은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다움을 찾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다가 상태가 악화됐고, 이후는- 음, 이미 말했으니 반복하진 않겠다.


"그러니까 아저씨!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얼른 내려갑시다!"


정신이 번뜩했다. 또다시 우울의 늪에 빠지려는 찰나, 다름이 아버지의 등짝을 찰싹 치면서, 옆집 청년이 큰 소리를 쳤다. 아저씨는 울다 웃어 켁켁대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내 딸이 컸으면 자네만 했겠어. 아주, 소개해주고 싶은 청년이구만."


옆집 청년은 머쓱하다거나 부끄럽다거나 뭐 그런 게 아예 없었다. 마치 여기저기서 그런 소리 많이 들어본 사람처럼 익숙하게 윙크를 해 보이곤 손을 흔들어 아저씨를 배웅했다.


"여기서도 인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나 사위 삼고 싶어 하는 어머니 아버지들 많았거든요."


앉아 있던 언덕으로 돌아온 청년은 익살스럽게 웃었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술술 자기 자랑을 떠벌리는데, 어쩐지 알맹이는 없는 느낌이었다. 스스로에 대해서 다 오픈한 것처럼 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비밀스러운 부류.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적당했다. 안 그러려고 노력은 했다. 안 알려줄 거 알아서. 그래도 이성이 감성을 앞설 수는 없는 법.


"근데 왜 여기 와 있어요?"


청년의 웃는 눈이 퍽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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