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두 달 정도 전 어느 일요일.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있는데 2년 전 담임했던 아이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00가 선생님 찾아갔다 왔다면서요. 저도 인사를 드리러 갔어야 하는데. 잘 지내시죠?"로 시작한 그 통화는 뜬금없이 계속되는 '감사합니다.'로 끝났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막 일어난 티 안 내는 데에 신경 쓰느라 정신없었던 나였지만, 왠지 그분이 흐느끼면서 나와 통화하신 듯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어머니가 전화하시기 며칠 전에 그 아이가 찾아왔었다. 우리 반에 아는 동생이 있는지 어느 날부터 우리 반 아이 입에서 "선생님, 00 오빠가 월요일에 찾아온대요." "선생님, 월요일 아니고 목요일이래요." 소리가 몇 번 들렸는데 정말로 며칠 뒤에 그 아이가 교실로 찾아왔다.
뭐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나 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는지 마주 앉아서는 나를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했고, 그러다가 당뇨병으로 병원치료를 받으시던 그 아이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안 그래도 가정형편이 안 좋은 아이였는데. 15살 때부터 아버지 없이 살려면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에 가슴이 탁 막혔지만, 문득 머리를 스치는 기억 때문에 별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고 칼같이 말을 이어나갔다.
"힘들지. 나도 너 담임할 때 아버지 돌아가셔서 네 마음 안다. 그런데, 너희 어머니는 너 힘든 것 딱 10배 힘드셔. 그러니까 일단 1년 정도는 어머니한테 서운한 것이 생겨도 절대로 대들지 마라."
아빠 장례식을 마치고. 장례 관련 일을 처리해 주신 아저씨께서 나랑 내 동생에게 해 주셨던 그 말. 뭔가 울컥하는 일이 있어도 나를 누를 수 있게 해 주었던 그때 그분의 말. 그 아이가 나에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이야기를 했을 때, 이번엔 내가 이 말을 해 주어야 하는 위치라는 느낌을 받았고. 충분한 위로에 앞서 그 말을 내뱉었다. '1년간 절대로 대들지 마라.'
아이가 집에 가서 어머니께 그 얘기를 그대로 전했나 보다 생각이 들면서 문득 나 자신이 우스웠다. 난 진짜 아빠 돌아가시고 1년간 잘 참았었나, 그 아이한테 독하게 그런 말 내뱉을 자격이 있나 싶어서.
내가 선생 하기 싫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이거였는데. 충고하는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 고작 스물몇 살 때부터 어른이나 된 양 이래라저래라 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 어머니의 눈물 맺힌 그 목소리를 들으니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았구나 싶다.
내 귀에는 2년 전 아침자습 시간에 교실로 전화해서 "선생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제가 00 이가 우리 아이 괴롭힌다고 얘기했잖아요. 뭘 어떻게 했기에 애가 전학을 가고 싶다고 하냐고요! 저 교장실로 찾아갈 거예요!"라고 악을 쓰셨던 그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쟁쟁한데.
나를 비난하던 그 목소리가 흐느끼며 고맙다고 하니 기분이 영 이상하다. 내가 그 아이 어머니보다도 어른의 위치에 앉은 것만 같아서 기분이 찜찜하다. (2012.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