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안쪽_14.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예전이다. 아니 아주 오래전이다. 내가 30대 중반쯤이었을 때이니. 최영미 시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세상에서 주목을 받았다. 시가 뛰어나다 해도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젊은 시인에게는 특별한 일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여러 언론에 노출되며 일약 스타로 등극하는 듯 했다. 그때 나도, 나보다 불과 몇 살 차이도 나지 않은 젊은 시인의 행보에 관심이 많이 갔다. 또한 제대로 시를 쓰고 있지는 못했지만 마음에 웅크린 시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나에게는 자연스런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대개 나이대가 10년 단위로 전환점을 삼기도 한다. 10대, 20대, 그리고 30대를 거쳐 오며 아무리 무감각하고 초월적이라 해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기는 어려운 게 사람의 심사가 아닐까 하는 데, 나도 얼핏 그런 생각을 했었다. 드디어 30세가 되었다. 이립(而立)이라는 고전적 의미를 떠올리기도 했지만, 다시는 오지 않을 20대를 보내며 느꼈던 감정적인 무언가를 수습하는 과정을 지나치며 잠시 심사(心思)를 다졌던 기억이 있는데, 보다 민감하고 다양한 사고경험에 매어있을 예술가들의 경우야 보다 더 하리라 여기면서, 나는 최영미 시인의 시를 읽었었다.
한편 “서른”을 떠 올리면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세』라는 책이 생각난다. 바하만의 『삼십세』는 나이 “서른”을 맞은, 또는 “서른살”에 대한 자신의 정서와 관련된 글을 모은 산문집(단편소설집)이다. 그녀가 하이데거를 전공하여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철학자이지만, 시와 소설, 방송극을 쓴 문학작가로 더 알려져 있으며, 이런 프로필의 바하만은 여류 작가라는 구분으로 ‘아마도’ 한국의 많은 여성 독자들이 공감하며 그의 메시지에 서른을 맞거나, 지나면서 스스로 겪고 있던 무언가를 치유하게 되는 공감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와는 수평으로 반대편에 살았던 독일의 철학자요, 시인, 소설가인 그녀의 삶과 극복에 대해, 그녀가 겪은 ‘서른’ 시기를 한국의 (이를 특히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시기와 장소를 초월하여 인간이 겪는 공통적인 삶, 삶의 과정에 대한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독자들을 다독이거나 의지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며, 이것이 예술의, 문학의 한 역할이지만, 감사함을 느낀다.(오지랖이고, 주제넘은 생각이지만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이처럼 특히 “서른”을 테마로 글이 쓰여 지고, 그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였다는 것은 이 ‘연령에 대한 의식’에 부여한 의미가 어느 정도는 특별하기에 그러한 것이라 여겨진다. 어쨌든 우리는 이런 식으로 우리의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고 살아 왔다. 지금 그 두 배의 시간을 산 나로서는 새삼스럽고 그때의 그 심사는 잘 떠올려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보니까 내 자식들이 이 나이대가 되었다. 특히 큰애는 딸인데 벌써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고, 아들인 작은 애도 올해 서른이 되었는데, 새삼스럽게 그 시절의 나의 경우와 겹쳐지며 마음이 짠해지는 것을 경험하였다. 나의 아득한 그래서 대부분 잊혀지고 희미한 채로 어떤 여운만이 남아 그 마저도 떼 낼 수 없는 일부의 것으로 여겨지는, 흔히 관대한 기분으로 되돌아보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은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간 세상의 변화도 많았고 그런 속에 사람에 영향을 주는 무수한 변수들과 그 결과들이 전혀 나 때와는 다른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과연 동일한 정체성을 가졌는가 의심이 들어야 정상일 지금, 나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며 생각을 해 보아야 하나, 부끄럽게도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나는, 지금보다야 개인이나 나라의 사정에 비추어 썩 좋은 조건은 아니었을 지라도 나름 속된 측면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희망을 가질 수 있었고 적당한(?) 수준의 꿈은 나의 노력으로 또 능력을 통해 이룰 수도 있었으며, 또한 눈에 보이는 여러 장애들도 확실히 파악이 가능한 만큼 돌파하거나 극복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그다지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그저 막연하고 잘 알 수없는 개인의 내면의 갈등이나 복잡한 인지와 감정구조를 잘 제어할 수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 뿐이다. 그러데 지금은 어떠한가?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세상이다. 이미 21세기로 바뀐 것처럼, 4차 산업혁명시대이니, 인공지능이니 디지털 혁명이니 하며 모든 사회체계가 내.외적으로 달라졌으니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이나 내면구조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세상 구조 자체가 바뀌었으니 이미 다른 세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어른이라서 인생선배라서 무슨 조언이라도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어렵게 느껴진다. 그저 ‘나 때는 말이지’ 하며 예전 얘기를 꺼내 봐야 시쳇말로 대놓고 ‘꼰대’라는 소릴 들을 뿐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 다른 일에는 마치 손을 놓고 있는 듯이, 그리고 나이 들어서 까지도 피치 못할 인생의 숙제를 끌어안고 있다시피 하면서 나 하나도 주체 못하는 듯 살아가는 무책임한 가장일 뿐인 나는 그 사이 우리 아이들이 이리 커 버려서 나이가 서른이 넘은 어른이 되어 있는 것에 놀랄 뿐이다. 속으로 부끄럽고, 그래서 마음속에 드는 나에 대한 책망과 위축된 심사를 감추고 있을 뿐이다.
하여튼 어린 시절의 모습을 기준으로 어리게 만 생각하며 그 계층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던 나는 이런 급격하게 커져버린 변화의 격차에 당황스러울 뿐이면서도 그 수습에 대한 방법은 없을까 때론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세상을 좀 살다보니 때론 나의 능력과 조건을 뛰어넘는 일들이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수시로 일어나고 내 생애조차 내 의지대로 주도하지도 못하는 것을 여러 번 확인하며 겪다보니 인간의, 아니 나의 무력함을 그저 인정하는 것이 나를 조금은 편케 하는 것이란 생각에 이르르게 되었기에, 결국 그저 그런 애매한 능력자로 근근이 살아가며 소소한 삶의 에피소드들을 즐기고 받아들이며 사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자구적인 해법을 터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의 무책임함과 무능력을 큰 힘과 질서 탓으로 돌리며 나의 의지와 욕망과 같은 희망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나와의 타협을 해야 하였다. 이러한 식이니 더 이상 아이들에게 이런 심정을 토로하지는 않아도 마음속으로 나의 입장을 견지하게 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에게 그 이상의, 또는 지난 것들에 대해 되돌려서 무언가를 제시할 해결안이 없는 상태이니, 결국 나는 나의 아이들이 무사히(?) 잘, 자신의 삶의 시기를 지내고 또 이뤄내고 그래서 나름의 성과를 즐기면서 살아가기를 기원하면서 지켜볼 뿐이다. 그러면서도 나의 자식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지금 이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까? 언제까지 아이들일 것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리 내외적으로 커버린 어른인 아이들을 새삼 의식하니, 얘 네들은 어떤 생각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여러 것들을 맞닥뜨리고 있는 걸까? 그렇게 어떤 언어적 표현도 자제하며 나의 의식이나 생각이 들어간 표현도 미루면서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최영미 역시 서른을 좀 특별하게 바라보았거나, 의무적으로 진지하게 생각을 해왔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욕망으로 삶에서 겪는 온갖 것들을 그저 그대로 받아내면서 자기의 삶의 과정을 지켜내고 나아가려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시절보다 더 좌절할 만한 것들을 목격하고 경험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세계를 지켜내는 것의 힘겨움, 세상의 물결에 휩쓸리며 적응해가는 자신을 의식하면서 더 이상 자신의 서른 살의 연륜을 버텨내기 힘들다고 토로하고야 말게 되는 것으로 나는 읽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세상에 대한 선언까지는 필요했을 까 싶지만, 그의 자존감이 이런 식의 세레모니를 유도하였을 것이다. 서른이 되어가는 무렵에, 즉 20대의 삶을 거쳐 살아오면서, 그는 서른에 다가서는 때에 문득 이런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전략)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하략)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결국 20대와 그 시절에 겪은 것들을 상대적으로 잔치에 비유할 수 있다면, 이제 서른에 다가서는 지금은 잔치 이후의 후유증으로 수습해야 할 뒷마무리에 해당 할 일이라고 여기려는 의도가 느껴지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개인적인 부분에 있어서 비교적 청춘의 시기와 맞물려 지나가 버린, 돌아오거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유산이나 유물에 불과한 듯, 체념하듯한 뉘앙스를 전해주고 있다.
더 상세하고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는 않으려 한다. 최영미의 시적 표현으로 대중적 이슈와 작품성으로 평가되어 누구나가 공유하고 공감할 여지를 요구하고 있으나, 한편으론 최영미 시인의 개인적 체험이나 고유한 감정 작용에 따른 개인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고, 대중에 공개된 문학작품이라 하여도 독자의 이해와 인식의 차이로 인한 거리(距離)는 있을 터이다. 그러나 한편 최영미의 대안 역시 모색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쉽게는 허락할 수 없는 자신만의 변증법적 대안처럼 여겨지는 삶과 세상에 대한 시선과 은근하지만 힘이 실려 있으니, 실망만 하기 엔 이르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고 있다는 나만의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한바탕 서른에 대한 최영미식의 기념식은 정리되는 듯 했다. 그가 지키고 또 얻고자 했던 세계를 뛰어넘고, 한편 그 너머에 있을 새로운 미래의 세계에 대한 기대, 그는 과연 그 이후에 그것들을 잘 수확하면서 살아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 그 무렵에 그는 언론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거나 소통의 시도를 꾸준히 하고자 했던 것 같다. 다양한 방식으로 꾸준히 글쓰기를 지속하면서 시인으로, 정직하고 열심히 사는 작가이며, 사회구성원으로서. 그러나 그 이후 썩 유쾌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을 접하고, 그 이후 이런 저런 뒷말들도 들렸던 것 같다.
나는 최영미에 대해 글을 쓰는 중은 아니었으니, 더 이상의 의견은 지속하지 않으려 한다.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고 성숙기를 지나 노년으로 가는 과정에서 수도 없는 변화의 기점들과 요소들과 마주 하게 되고 그것들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하니 그 다양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것들의 경우의 수를 어찌 다 예상하고 감당할 수 있겠는가? 또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절대적인 과정이니 누구도 예외 없이 나름의 해법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러하니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애틋한 나의 자식들에게 만의 유리하고 특별한 과정을 따로 겪게 하거나 비장의 무기를 마련해 주기도 어려운 것이니, 그저 두 눈뜨고 애처롭게 바라만 볼 수밖에 없지 않을 까 한다. 어쩌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러하셨으리라 생각하면서, 마음으로부터의 눈물이 흐르지만, 어쩌는가? 수퍼맨같은 아버지를 둔 자녀들은 좀 나을까 싶지만, 그래서 더 마음은 무겁고 아프지만, 이런 것이 인간의 삶이며 누구나 겪었던 것이려니 하고 받아들일 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다만 흔쾌하고 당당하게 “서른, 그 까짓 거, 지나가는 것이다. 이제 더 큰, 또 거친 대처(大處)로 나가 함 부딪혀 보자. 지난 세월은 지난 대로 일단 접어두고 미래를, 앞으로를 신경 쓰며 뭔가 해보자. 뭔가가 있지 않겠는가, 나를 한번 믿어보자” 하는, 결국 믿을 건 자신밖에 없음을 다시 인식하면서 자신의 강한 잠재력을 믿고 끄집어내어보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나 역시도 이미 현실적으로, 또 감정으로는 지금까지 자식들에게 내가 한 것에 다른 변명거리 조차 찾을 수 없으니, 그래서 더 이상 힘이 되긴 어렵고, 스스로 이겨내고 이루어내는 자신만의 역사를 써보라고 조용하게나마 마음속에서 소원을 빌 듯 외쳐볼 수밖에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