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안쪽_12.
나도 이미 환갑(還甲)이 지났으니 노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요즘의 분위기로는 자타가 공히 이를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어정쩡하다. 젊은이는 분명 아닌데 늙은이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 그 경계에 서서 스스로 애매함을 자초하는 중이다. 이는 한편으론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요 마인드일 수 있지만, 불가피하게 주어지는 요즘의 세태를 반영함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마음으로는 어느 쪽에든 서 있어야 한다면 나는 어쨌거나 늙은 축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중이다.
점점 나이 듦을 느끼면서 이를 인정하게 된다. 아무리 100세 시대가 누구에게나 흔하게 거론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해도 그간의 인식이나 사회적 구조를 쉽게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요즘 들어 자주 내가 취(取)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몰두하곤 한다. 그동안 과거의 연장선에서 꾸준히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고 그래서 좀 더 나은 삶을 도모해온 편에 속하지만 실제로는 그 성과를 제대로 이루고 누리지 못한 체 지금에 이르른 나로서는 갑자기 노년세대로서의 새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사회적 인식이 당황스럽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인생이란 일정한 단계와 때가 있는 것이고 그 단계에 적절한 목표와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그것으로서 유효한 만족이나 의미가 희석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제 때에 해내지 못한 것에 후회와 아쉬움을 느끼며 낙심하기도 하지 않는가 생각이 든다. 따라서 그 어느 때에 원하던 것들을 누리고 남들이 겪지 못한 성취감을 체험한 이들은 자타가 모두 부러워하거나 자부심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면 참 답답하다. 쉽지 않은 기회와 조건에 매이어 마음껏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해내지 못한 채, 단 한 번의 삶을 다소 허망하게 흘러가도록 한 탓을 매우 강하게 스스로에게 해야 하니 말이다. 지금까지의 나름 애쓰고 노력한 수많은 피와 땀을 동반했던 기억들이 남들에게는 고사하고 스스로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되었다는 허무감은 삶 자체에 대해 상실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우연히 ‘라인홀트 메스너’라는 작가가 쓴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에 쓰여져 있는 작가소개의 글을 읽어보니 ‘행동하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천미터 급 14봉을 모두 완등(完登)하였고, 그린란드, 티베트 동쪽, 고비사막 등을 횡단한 등반가, 모험가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 작가는 2004년까지 5년간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의원으로서 활동을 마친 그는 이순(耳順)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오래전부터의 꿈이기도 했고, 삶의 짐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마주하는 경험, 잘 늙어가는 방법을 깨닫는 시간을 경험하기 위하여 이런 힘겨운 도전을 하였다고 쓰고 있다.
나는 이 작가의 글 중에서,
“나는 나이 드는 법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내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나이 드는 법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말에 꽂혔다. 그저 살아가면서 나이가 드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열심히 자신과 가족과 사회와 나아가 나라를 위해 노력하고 보니 어느새 이 나이가 되었다고 다소는 씁쓸하지만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많이 만날 수 있지만, 자신의 진정한 삶을 성찰하며 나이가 들어갈수록 제대로 나이를 먹어가는 법을,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일상에서 주어지는 특권이나 기회조차 버리거나 벗어나서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장비만을 지닌 채 험난한 사막 한가운데를 몸소 들어가 자신을 찾거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나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없는 공간에서 온전히 자신을 날 것 그대로, 즉 자신 안에 존재하는 ”사막“을 온전히 들어다 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이 사람에 대하여, 순간 다르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예순의 나이는 과거보다는 그 나이에 대한 인식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나이이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는 주역이 아닌 채, 은퇴하거나 밀려나게(?) 되는 나이인데 그렇게 되니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축시키거나 나아가 좌절하면서 그동안 보여 왔던 자신의 이미지나 모습이 아닌 행동이나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작가는 그렇지 않은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일부 사람들은 이 작가가 이미 행동하는 철학자로 평가받을 만큼 특별한 시도와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구분하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가, 인간의 삶이 이리 구분되고 차별된다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신께서 인간을 창조하고 생명을 부여하면서 이미 평등하고 공정하게 기회를 부여하였고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도록 하락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따라서 누구는 그리 살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통제되거나 분류되는 것이 아닌 세상에서 각자의 선택이고 스스로에게 맡겨진 것이다.
나는 이 작가의 글을 읽으며 내가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인식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을 비교하면서 다소는 서글픔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었다. 나이 들고 늙어간다는 것은 심리적으로도 여려지지만, 정신과 체력적으로도 이전(以前)과 비교하여 저하된 상태로 불가피하게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 ‘나’이지만 과거의 특정 시기와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나’로 바뀌어 있게 된 셈인데,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인정할 수 없으니 서글픔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결국 나는 환경의 변화와 함께 자신의 변화까지 동시에 경험해야 하니 이중고(二重苦)의 변화 덫(trap)에 갇힌 모양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전례 없는 급속한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여차하면 뒤쫓아 가기에도 벅찬 신기술, 신문명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이다. 또한 그 기술과 지식은 과거의 것과 많이 다르고, 나이 든 사람들은 과거의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회피하려는 속성이 있다 보니, 결국 자발적으로 변화를 수용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러하니 본의 아닌 세대 갈등이니 소통의 부재니 하는 문제점들이 이러한 환경과 수단적 요인으로 해서 더 부가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환경변화에 적응을 위한 “변화”노력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듯하다.
니체는 “허물을 벗지 않은 뱀은 결국 죽고 만다. 인간도 완전히 이와 같다. 낡은 사고의 허물 속에 언제까지고 갇혀 있으면, 성장은 고사하고 안쪽부터 썩기 시작해 끝내 죽고 만다. 늘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사고의 신진대사를 해야 한다.” 고 하였다.
오늘날은 과거에 비해 많은 부분들이 달라졌으며, 우리 환경 속에 속한 모든 것들은 과거와 비교해 매우 빠르게, 많이 달라져 있다. 당장 일상적 삶속의 대부분의 수단들부터 대상을 바라보는 사고와 표현들 무엇하나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없기에 나의 과거를, 나의 경험을 아무렇지 않게 표현하거나 나아가 강조하는 일이 매우 불편하고 어색할 정도로 다르거나 거부감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하니 그저 내가 원하고 편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도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젊은 사람들은 요즘 자신들과 다르거나 시대에 적절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거리를 둘 뿐 아니라 서슴없이 “꼰대”라는 표현을 통해 폄하하거나 불편한 심사를 드러내곤 한다. 이런 태도와 방식은 과거에는 쉽게 드러나는 부분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기본 예의라든가 윤리적 측면에서 일단은 걸러 내거나 회피하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는 배려심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요즘은 그런 경우가 점점 드물어 가고 있다.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표현하거나 다른 것에 대한 고려조차 하지 않으려는 인상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러하니 서로 소통은 고사하고 명확히 갈라서서 대립하고 갈등하는 모양새가 되기도 다반사다.
결론은 니체의 언급도 있었지만, 환경에 대한 적응이나 변화는 시대를 초월하여 불가피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성장을 꿈꾸기 마련인데, 성장이 아닌 생존을 위해서라도 과거의 낡은 사고와 틀을 버리고 늘 새로운 사고의 신진대사를 통하여 새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이든 사람들이 겪은 지혜로운 경험 자산으로 현재 자신들에게 주어진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하는 방법은 이 뿐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챌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를 자극하고 생명력을 북돋았던 생명의 바람은 이미 오늘의 바람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지금 부는 바람은 새로운 바람이며, 그 바람을 맞으며 살 방도를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