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안쪽_13.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란 무엇인가?』
스무 살 무렵.『지식인란 무엇인가?(지식인을 위한 변명)』, 나는 이런 제목의 책에 끌렸다.
<장 폴 사르트르>를 들어는 봤지만 잘 알지는 못했고, 소위 세계적인 대단한 지식인, 즉 문학과 철학분야의 석학이라는 명성만을 알 뿐이었다. 고작 스무 살이었고, 이제 세상에 눈을 뜨고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혹 내 또래의 누군가는 이미 몇 권의 책을 읽고 아는 체 하며 앞서 나가는 듯이 보이기도 했겠지만(물론 그들도 그리 대단하게 알고 있지는 못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그보다도 훨씬 못하게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무식한(?) 상태였고, 또 막 대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그러나 이런 제목의 책에 끌린 것을 보면, 내게는 지적 허영심이 있었고, 그래서 그 반대편에 속할 열등감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이런 방향으로의 이끌림이 자연스러우니, 이 분야에 속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으며, 어쨌거나 긍정적으로 지적 호기심이 어느 정도는 있었으리라는 짐작은 해본다. 그리고 사회적 흐름의 단계에서 성장을 위해 과거의 단계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겪는 자연스런 발전 과정의 한 부분이라 해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이 책을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요즘 그 책을 들쳐보면 밑줄을 치기도 했고, 메모 쪽지도 써서 책갈피에 끼워두기도 한 것을 보니 그렇게 짐작을 해본다. 그러나 지금은 그 내용이 낯설고 알 수가 없기까지 한다. 읽었다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고, 새롭기 까지 한다. 물론 당시의 나의 이해력이 부족하였거나, 오늘날의 망각 상태로 인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그때의 그 책이 지금도 내게 있고, 그때 읽고 공부한(?) 흔적이 남아 있어 어느 정도는 추억거리로의 만족을 추측해 볼 뿐이다. 그 시절도 벌써 40년을 넘어 50년이 다 되어가는 세월 이전의 일이다. 또한 그 세월 동안 나는 철저히 사회생활에 적응하여 그런 지적이거나 학구적인(?) 분위기와 상관없이 세속적이며 실용적인 책읽기에 몰두하였고,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일들을 다루면서 살아왔으니, 지금은 아무리 사르트르이고 실존주의 철학자의 대가라고 한 들, 거리가 꽤 먼 부류의 지식인이 되어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시간적 거리만큼이나 시대적 차이가 크니, 시간 거리로 비례하여 알아낼 수도 없이 되어버린 그때를 복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그 당시를 회상하고 그런 과정에 대해 어떤 식이든 의미를 찾고자 하되, 내가 찾으려는 개념의 단서를 연결하려는 의도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스무 살 무렵의 내가 시도했던 당시의 풋풋하고, 세상을 알아가려 노력했던 젊은 나의 잊혀 진 모습을 나 홀로 떠 올려 보며 추억하려 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지적인 활동이나 그 내용 자체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그저 과거를 회상하는 나이든 자의 여유로운 시간여행 정도라고나 할 그런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에 그때의 그 책, 이미 오래되어 낡고 퇴색한 그 책을 다시 꺼내드니 묘한 감정에 휩싸임을 잠시 느꼈다. 시간차와 관계없이 그때의 풋내기 모습이, 유치하거나 서투르게 여겨지는 미숙의 모습이 떠오르니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때의 그 치기에서 나는 어느 정도나 성장하고 성숙해진 것인지, 나의 사고와 인식이라 한다면, 그 바르고 정의로운 마인드를 얼마나 간직하며 나잇값을 하고 살고 있는지, 살아왔는지를 따지게 되니 갑자기 슬프고 눈물겨워지기도 하였다. 세월 값도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무책임하고 일방적이며, 고작 제 한 몸도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하면서 어디 어른행세나 해보려는 심보를 갖게 된 것인지 하는 질책을 스스로 떠올리게 된다.
이런 고백을 하려고 하니, 그나마 간직할 수 있는 미숙하고 미완이나마, 순수했을 수도 있었던 그 때의 원천을 더럽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기는 한다. 아무튼 서글프고 안 되었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애는 써봤는데 고작 이정도로 살 뿐인 내가, 그간 무언가 되어 보고자 이 세상을 떠돌아 다녔던, 그 헛된 노력이나 대상에 대해 연민이나마 느껴보는 것이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라는 제명의 이 책은 원제가 「Plaidoyer pour les Intellectuls」이다. 번역하자면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다.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당대 최고의 지식인,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가 1960년대에 쓴 글이다. 시대적 상황의 변화가 급박하였고(언제라도 세상은 변화가 불가피하였으니 시대 상황의 부산물은 아니지만), 예민하게 사회적 대립이나 문명 발전적인 기술과 의식의 변화가 부상하고 있으니,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의식이나 그에 따른 당연시 될 의견제시, 또는 정리가 필요했던 것인가? 사르트르는 일본에 가서도 이 책의 근간이 되는 내용으로 이미 강연을 한 바 있었고, 결국 이를 책으로 출판하게 된 것 같다.
사르트르의 철학이나 지식의 근간에 해당하는 것을 내가 이리 준비 없이 거들거나 아는 체 할 수도 없거니와, 이 글은 그런 글을 쓰려고 시작한 것이 아니니, 논점을 피해 갈 생각이다. 다만, 사르트르가 이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지식인들이 처한 불편한 입장을 전제하며, “불편한 지식인들에게”라고 소제목을 달아 서문을 대신하고 있는데, 그는 “지식인의 개념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 라는 전제를 강조하고 있고, 그것을 당연시 하면서 세상과 소통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오래 전에 세상이 인지하고 있는 지식인들을 ‘고전적 지식인’으로 분류하면서, 지식인은 ‘비독립적 존재’라는 것을 설명하려 하고 있었다. ‘지식인 고유의 불편한 의식’이란 지식인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라 할 수 없으며, 전문기술자를 민중 세력의 급진적인 동반자로 변모시켜주는 중간의 잠정적인 단계에 해당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직업, 즉 자신의 사회적 존재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자신들이 민중의 편에 서서 정치인들을 고발하며 민중의 편을 든다고 해도, 결국 지식인은 민중의 적이라는 입장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아무튼 이런 식의, 책과 관련 된 내용은 더 이상 서술하지는 않으려 하는데, 이 부분까지의 분위기로 봐서는 지식인이 처한 묘한 입장에 대하여, 사르트르가 무언가 설명이나, 정리를 하고자 시도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의 문제 제기이며, 이른바 고전적 관점에 젖어있었을 당시의 지식인상과 그 이후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는 크게 문제가 되는 갈등이나 모순적이어서 정리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남아 있지는 않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탓도 있겠지만, 매우 현실기반적이며 통찰력이 뛰어난 대단한 지식인이어서 인지는 모르나, 오늘날 보다 복잡하고 다변화 되어 있는 지식시대에 적절하며, 다양한 관점에서도 매우 자연스런 표현이나 시각이 무리없이 어울림을 느낄 수 있다. 즉 사회와 동떨어진 인문철학적 관점으로 치부될 소외되거나 낙후된 것이 아닌, 어떤 분야의 확대된 지식분야와도 어울릴 진일보한 관점들이 배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즉, “지식인은 자기의 직업을 사회적 존재의 한 부류로 인지하고, 이런 입장에서 다른 사회구성원과의 관계설정”이 필요하며, 자신의 불편한 의식, 즉 지식이라는 불편한 의식이 있음을 알게 된 이후의 상황인식이 결국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였고,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알게 된 “불편한”의식단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문제에서부터 공격하기 시작해야 하고, 새로운 민중적 제도를 추구하기 위해 “지식인적인 순간”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사회의 다양한 방면에서 이미 확산되고 구축된 사회시스템과 조화가 되는, 다양한 학문 분야가 추구하는 tone & manner에서도 일치하는 부분이 아닌 가 한다.
아무튼 나는 사르트르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제기에 스스로 답을 하면서 그것이 결국은 지식인의 위치와 역할을 부정하는 식으로가 아니라, 보다 진보된 발전을 위해 스스로를 부정하고 틀을 깨고 지식인을 요구하는 세상으로 더 나서야 한다는 열린 발상으로 자신의 의견을 펼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변명”이라는 다소 부정적이고 한편 비굴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용어를 통해 주장을 펼친 것은 반대로 선제적인 의견제시라고 할 수 있어서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내가 이런 맥락에서 글의 제목을 곧바로 “변명과 성찰”이라고 하였다는 의도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변명”이라는 본래의 뜻만 가지고 출발한다면 그런 생각을 피할 수 없을 수도 있을 테지만, 다소는 우회적으로 접근하면서도, 간단치 만은 않은 배경과 이유가 있을 수 있기에 그런 뉴앙스를 담으려는 속뜻은 있다는 것만 밝히고자 한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의 나와 나의 생애를 반성하고 있는 편이고, 한편 어느 면에서는 변명을 하고자 할 만큼, 부끄럽고 핑계 거리 삼을 만큼의 여러 이유를 들며 나 자신을 변호하고 싶기도 하다. 결국 남은 것은 지금이 다이고, 지금까지의 내가 그간의 내가 살아온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니, 솔직하지 않고, 변명을 구색으로 채우려 한들 가당치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마음을 담으면서도 지금까지의 나를 어느 정도는 변호하고 싶어졌다. 여전히 나는 현재의 이 모습이 내가 다다른 마지막이 아니며, 여전히 나아가는 중이고, 방향이 있으면서도 때론 방향 수정도 있을 수 있는, 그래서 의욕과 욕망을 담아 나를 좀 더 채워가고 싶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자신을 알았고, 스스로의 뜻과 그릇과 그릇의 크기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과거처럼 막연하거나 무모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조금은 개선되고 다듬어 졌기도 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의 도중에 있으니, 그대로 멈춰서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내가 가야할 마지막 지점까지 꾸준히 가고자 스스로를 독려하고 위로(?)를 하기도 하려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을 담아,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보고,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나의 생각이나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만 내가 나에게 한 변명이나, 자신을 부추기며 느끼고 깨닫게 했던 많은 것들이 그동안 있었음에도, 변화하거나 더 나은 쪽으로의 발전은 쉽게 이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타고난 재주도 일천하고, 마음의 크기나 그간 스스로 배우고 단련시킨 과정이 미흡했던 탓인지, 이런 수준정도에서 나의 캐릭터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래도 좀 더 애쓰다 보면 조금은 달라지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적 요구에 맞는 것 역시 같은 처지에서 다뤄지겠지만, 나 자신과 살아가는 환경에서의 많은 것들을 보다 잘, 성의 있게 나아가 성숙하게 다뤄가면서 나를 이끌어 가고자 한다. 한 평생을 살아도 사는 것을, 삶을 잘 모른다고 들 하는데 결국 나도 그런 의견을 마지막에 하게 되겠지만, 아직은 좀 더 남겨 두고 내 길을 가고자 한다. 따라서 나의 “변명”이나 “성찰”은 여전히 필요한 소스(source)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