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화석 Oct 04. 2024

나이 마흔 무렵

내 삶의 안쪽_10. 데이빗 소로우《월든》, 찰스 핸디《헝그리 정신》

나이 마흔 무렵, 1995년에서 1996년 쯤에, 나는 홍콩의 영화감독 <왕가위(王家衛)>의 영화를 몇 편 보았다.


『중경삼림(重慶森林)』, 『동사서독(東邪西毒)』등 기존의 홍콩영화들과는 좀 다른 풍(風)의 영화들인데, 영화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저 틈틈이 영화를 즐기는 편의 평범한 관객에 불과한 내가 보는 관점에서 색다른 메시지가 느껴지는 이런 영화들에 매료되었다.     


고독한 사내 또는 인간의 고뇌와 솔직한 감정 표현을 미루는 미적거리는 존재들의 안타까움도 이렇게 특정하게 그러나 좌절스럽지 않게 표현해 내는 <왕가위> 감독의 시각이 일정하여 좋았다. 물론 누구나 이런 의도할 수 없는 일들에 노출될 수 있고 따라서 흔한 연관성이 느껴지는 감정이고 설정일 수 있다. 그럼에도 매우 특별하고 불가피하면서도 흔하지 않을 숙명적인 일처럼 여겨지게 한다. 이는 연상되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이벤트가 있음으로 해서 마치 연상이미지가 뚜렷하게 드러나니 감정에 무게가 실리게 되어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벌어지는 무수히 많은 일들은 때로 애매하거나 우연찮게도 어긋나 버리는 순간과 과정으로 해서 서글프거나 처연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로 인해 얻게 될 상처 또한 마음속에 자리하게 되고, 이는 삶의 순간 속에서 내 비치며 영향을 주기도 하는 데, 다소 빗나가기도 하는 이런 기억들에 주목하는 감독의 정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나의 일방적인 판단이고 느낌이다. 보다 면밀한 관찰이라면 이런 시선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난 그때 이렇게 읽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하여는 벌써 30년이 다되어가는 과거의 기억이기에 정확성을 장담할 수는 없다. 그 당시 <왕가위> 감독이 주목한 것은 사회현상과 그 사회 내의 사람들의 의식과 삶이었지만, 우리들은 그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며 살아간다. 모두에게 흔할 일이면서 마치 나와는 거리가 있는, 있기를 바라는 일들을 나의 “안”과 “밖”에서 공유해 가며 살아간다.      


한편 우리는 다양한 경우에서 뭔가를 정하는 일에 주저하거나 미루는 일이 흔치는 않아도 자주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의지와 관점이 명확치 않아서 인가? 또는 결정이라는 순간과 그것의 지속성에 따른 그 한참 이후를 예상하여 그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장담이 어려워서 그런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스스로의 자신 없음과 그를 가장한 배려와 혹시 시간차에 의해 이루어질 자연스런 결정상황에 의존하고자 하는 것인가? 아무튼 복잡한 사고체계로는 무언가 정하기가 어렵게 되어있다. 결국 결정은 여러 가정과 대안들의 포기인데, 그 외의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대가를 현재의 소중한 것을 얻지 못하는 것과 바꾸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나은가 아닌가를 정하는 것은 중요한 사안이 아닐 것이다. 다만 이런 류(類)의, 마치 의사결정 장애로 치부할 일들이 멀쩡한 인간들에게서 보는 것이 어렵지 않으니, 현상의 하나일망정 평가는 미뤄두는 것이 어쩌면 옳은 일일 것이다. 아무튼 이런 메시지를 느끼면서 영화가 시각예술이기도 하니 각 화면에서, 또는 전체적으로 전해지는 영상에서 무언가 숨겨진 의도를 찾아보려 몰입했었다. 따라서 조금은 불편한 심정으로 영화를 보았던 셈이다.     


그 때는 20세기를 얼마 남겨두고 있지 않은 때였다. 불과 3~4년 후면 새로운 세기世紀에 접어드니 이 또한 대중들을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래서인가? 세기말 징후 운운하고, 한편으론 홍콩의 중국 반환도 이슈의 하나가 되고 있었기에, 『중경삼림』은 <왕가위> 감독이 영국의 홍콩반환을 앞 둔 시점에서의 불안감이나 기대 등에 대한 홍콩 사람들의 심리나 정서를 표현하고자 한 측면이 있었다. 이렇게 세계적인 관심사속에서의 당사자들인 홍콩 시민들의 내면의 동요와 함께 한국사회 역시 불안정서가 내재되어 있었다. 그동안 잘 나가는 듯 했던 국내 경제는 마치 푹 꺼지는 듯 거품경제가 붕괴하는 조짐이 있었고, 예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로부터 불과 1~2년쯤 후에는 IMF구제 금융을 받으며 굴욕적으로 서구의 시스템에 노출되거나 통제되는 상황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한 개인으로는 전혀 무용(無用)하고 무력한 상황들이 겹겹으로 몰려드는 상황에 어쩌란 것인가 싶은 심정으로 그저 멀찍이서 세상을, 마치 내 문제인 것을 남에게 내 맡긴 채로 방관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 뿐이었다. 

그때 나는 마흔 살에 임박해 있었다. 이미 안정적인 생활 조건을 갖추고, 그저 세상의 원리와 흐름을 이해하며 현 상태를 공고히 해나가야 하는 때로, 세상 사람들 누구나가 그리 알고 있는 그 나이였다. 이미 오래  전에 공자는 마흔을 미혹(迷惑)하지 않는 나이라고 공표하기까지 했으니, 보통 사람인 나 역시 그에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흔들리고 있었고 무언가 풀지 못한 문제에 얽혀 나아갈 방향에 의문을 안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마흔이 되면서 무언가를 결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만 했다. 그것에 대한 답을 찾고자 그동안 쌓인 것들에 의문하고 새로운 과제를 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자 하였다. 이는 한편 새로운 삶의 환경이나 그에 대한 모색이었으니, 기존의 익숙한 것을 버리려는 의도와 시도일 수 있어야 했다.     


그 무렵, 나는 찰스 핸디의 《헝그리 정신》,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그리고 얼마 후엔 찰스 핸디의 《코끼리와 벼룩》 등을 읽었다. 그리고 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대중적 베스트셀러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몇 권의 소설을 읽었다. 나를 이끌고, 나를 잡고 있었던 것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망을 읽어 내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마흔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저 나이를 더 하는 것이 아닌, 변화와 보다 나아진다는 것에 이끌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시도들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변화란 그저 오는 것이 아니고 과감하고 강력한 행동과 그에 따른 궤적이 주어지는 것인데, 따라서 그 폭과 파장의 크기를 감당해야 했다. 짧지 않은 영향권을 끌어안아야 하는 것을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한참 때인 20~30대에 난 그저 준비하고 적응하고 연속되는 수행의 과정으로서의 세월을 보내 듯, 하여튼 애쓰면서 세상을 견디거나 극복하면서 나의 안정적이고 내가 꿈꾸는 길로 접어들기를 버티며 기다리는 세월을 살고 있었다. 누구나 마음속에 그리는 자신만의 세계를 이룩하고자 하는 소망이 실제로 드러나기를 원하며 살았던 과정에서, 혹시 겪었던 아픈 기억들이나 상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 새로운 꿈의 실현을 기약하는 바로 그 때가 어쩌면 마흔의 무렵이 아닌 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견딤의 무게와 짐이 만만하지 않았던 듯하다. 이제는 그 고비를 지나 안정적인 상태로 접어들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순간에 새로운 복병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간에 견디고 겪는 과정에서 누적된 피로감이 적지 않았던 듯 심정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이 “피폐함”을 어찌해야 하는가! 새로운 꿈을 향해, 더 나은 조건을 바탕으로 변화를 시도하려 한 계획은 어이 없이 좌절을 겪을 수도 있게 된다. 아마 그래서 공자는 더 이상 미혹하지 말라고 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철저히 잘못된 계획과 계산으로 스스로를 잘못 리드(lead)한 실패한 자기관리자였던 셈이다.      


새로운 전망(展望)으로 새 도전을 꿈꾸고 그 기대를 실현하려 했던 나의 새로운 연대(年代)는 그 이후 많은 곡절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지난 일이니 이렇게 돌이켜 보지만, 그저 오고 가는 것이 아닌 게 인생이고 삶의 모습이다. 다만 세월이 지났기에 지금은 감정의 수사가 빠져 밋밋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그래서 헛헛하기만 할 뿐이다.                                                       

이전 09화 나는 달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