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추얼적 패턴에서 배우다- 찰스 슐츠
예술은 지리멸렬의 과정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루아침에 '이거다'라는 깨달음과 확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어떤 것을 보면 이런 생각을 한다. '저 사람 아이디어가 참 좋다.' , '작품이 참 훌륭하다.' 그리고는 금세 자신은 왜 그런 사람이 못되었는지 생각한다. 혹은 자신과 예술을 이질적인 어떤 세계와 또 다른 세계 사이의 거리에 비유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이것을 깨닫기까지 수많은 자기혐오와 자기 불신 그 언저리에서 줄다리기를 해왔다.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아무도 알 수 없는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때로는 포기도 했다가, 포기가 안됨을 깨닫고 절망했다가, 어느 날은 다시 살아남을 느낀다. 그것은 괴롭고도 지루한 일련의 과정이다. 그것은 심지어 관계에도 영향을 끼친다. 자기 자신의 존재가 흔들리니 그의 우주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과 싸우고 있을 즈음 스누피의 아버지, 찰스 슐츠의 생애에 대해 우연히 읽게 되었다. 나는 거기서 몰랐던 세계를 알아버렸고, 위에서도 언급한 바로 '그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찰스슐츠는 피너츠를 연재하는 50년 동안 거의 연재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2~3시간 정도 아이디어를 구상한 후, 점심을 먹은 뒤 만화를 그리는 패턴을 유지했다. (점심 또한 매일 햄 샌드위치만 먹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파킨슨 병으로 쓰러졌을 때도 계속 그렸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미리 그가 연재해야 할 부분들을 그려놓았다고 했다.
찰스 슐츠의 단순하고도 명료한 생애를 엿보면서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껏 누구와 지루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가 창조 자체와 지루한 싸움을 벌인 줄로 안다. 하지만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이상적 나' 즉 '아상'과의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나, 혹은 나라고 지칭한 '세상에는 없는 그 존재'와 싸워온 것이다. 찰스슐츠는 예술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창작은 지금 여기에서의 '살아있음'이 만들어 내는 것임을, 그리고 거기에는 아상과 욕심이 없다.
삶이라는 책에는 정답이 뒷장에 있지 않다.
-피너츠-
예술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아상과 함께 살 수는 없다. 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본질을 알 때, 우리도 잘 살아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절실함이 우리를 성공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절실해지면 열심히 노력하겠지만, 반대의 에너지인 두려움이 우리를 압도해 버린다. 생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창조성을 몰살시킨다.
창조성은 '오늘'에 있다.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을 우리가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슐츠의 삶이 보여주듯 안정적인 하루에 깃들어 있다. 너무 들떠있는 감정 속에서는 창조성이 살아남을 수 없다. 그 감정이 너무도 강렬하여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배고픈 상태로는 창조성에 대한 집착만 커질 뿐, 창조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 중간 어디쯤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균형의 해답은 '살아있음'에서 찾을 수 있다.
창조의 속성은 지루함이었다. 놀랍게도 그 속성은 이 세상 단 한 명도 비켜가지 않는다. 지루함은 넓게는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하고자 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영광'을 즐거이 여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는 '고통'을 즐거이 여길 수 있느냐를 물어야 한다. 아무리 찰스슐츠라고 과연 그 50년이 즐겁기만 했을까. 그 지리멸렬의 과정에는 분명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통 속의 작은 기적을 누릴 수 있다면 그러니까, 균형을 잡을 수만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자신만이 맛볼 수 있는 행복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행복은 연필을 찾는 것,
비밀을 아는 것,
시간을 이야기해 주는 것,
행복은 휘파람을 부는 법을 배우는 것,
새 신발을 신어보는 것,
학교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는 것,
그리고 행복은 손잡고 걷는 것
...
-피너츠 노래 '행복'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