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고통에서 배우다- 에드바르드 뭉크,쿠사마 야요이
우리는 누구나 삶에서 밑바닥을 찍는 경험을 한다. 거기에 더해 때로는 자신의 고통이 스스로를 잡아먹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근래에는 정신이나 정서적 질환이 많아지면서 사회적으로도 그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지고 있다.
보통의 경우, 과거의 트라우마가 극심하게 올라올 때나 힘든 경험을 할 때는 교감신경이 활성화된다. 교감신경이 과다각성될 때에는 심장박동이 증가하거나 호흡곤란, 근육긴장, 만성통증, 멈추지 않는 생각 등이 일어난다. 몸에서 투쟁이나 도피를 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부교감 신경이 활성화되는 경우도 있는데, 해리상태가 되거나 심장박동이 낮아지고 혈압이 낮아지며 우울이 올라오는 반응이 일어난다. 이런 증상이 어쩌면 더 위험할 수 있다. 이 때는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서반응은 몸에 남은 부정적 에너지의 흔적일 수 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트라우마를 유발한다. 나는 정서적 질환이 빈번해지는 세상에서 자신만이 가진 근원적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예술가들이 궁금해졌다.
공황발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뭉크의 '절규'일 것이다.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역설적이게도 그가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느끼기가 어려워지지만, 그림에서 주의 깊게 감정을 느끼다 보면 평소 스쳐갔던 인상 외에도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뭉크는 자신이 자연의 비명을 들었다고 서술했고, 붉은 배경과 비명을 지르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불안과 공포를 캔버스에 시각적으로 담아냈다. 뭉크는 이 그림을 그린 이후로 자신이 느끼는 공포를 좀 더 객관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다.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공포 자체를 느끼는 것은 몸의 감각의 영역이며 그것을 감각적으로 재현해 표현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일어난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나면 자신의 감정까지도 어느 정도 떨어져서 보게 된다. 이것이 예술이 주는 장점 중 하나인데, 뭉크는 아마도 그렇게 자신이 느끼는 공포의 감정이나 몸의 감각이 자신과 분리됨을 새롭게 경험했을 것이다.
현대미술가 중에서도 비슷한 인물을 찾아볼 수 있다. 아주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쿠사마 야요이는 그녀가 겪은 공황이나 환각, 정신질환을 예술을 통해 승화시켰다. 그녀는 10살 무렵부터 환각을 보았고, 세상이 무한한 점들로 덮이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공포를 피하기보다는 시각적으로 그 증상을 기록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혼란을 질서로 만들어냈고, 반복과 규칙을 통해 공황을 극복했다.
현재도 그녀는 자살충동이나 고립, 불면, 환각등과 싸우며 지내지만 자발적으로 병원에 입원해 가며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호박 속에 있는 점들은 작가 자신이 만들어낸 패턴으로 정렬된다. 큰 점과 작은 점들이 규칙을 이루면서 무한한 반복을 이루는데 여기서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자신 안에 있는 공포를 무수한 점 안에 녹였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공황이나 정신적 차단이 일어나면 그 끝없는 극단적 공포와 생각의 굴레에서 자신을 고립시킨다. 위의 예술가들은 그 고단하고 끊임없는 고통을 마주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만일 한 예술가가 특정한 고통 속에 있다면 처음부터 완벽하고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려는 욕심 이전에, 그저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것들을 '배설'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배설의 행위로부터 승화는 시작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 배설은 어우러짐이 되며, 작품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좋은 매개가 된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창조하는 예술가로 살 수 있으려면 자기 자신의 고통을 마주할 용기를 내야 한다. 세상에 좋고 나쁨이 없듯, 자신만이 아는 그 고통은 훗날 나의 고통에 공감해 주며 고개를 끄덕여줄 누군가와의 조우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