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기척

2장. 선

by 바다별다락방


그는 선을 그은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움직임은 분명히 있었다. 누군가의 요구가 있을 것 같았고, 익숙한 방식으로 선을 넘으려는 기척이 스쳤다. 이전이라면 그는 먼저 설명했을 것이다. 물러섰을 것이고, 이해받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 너머의 공기는 조금 더 차가워 보였다. 골목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고, 누군가는 서둘러 지나갔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졌다. 그 얼굴 뒤로 바깥의 풍경이 겹쳐 보였다. 안과 밖이 얇은 유리 한 장으로 나뉘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는 그 풍경 속으로 다시 들어갔을 것이다. 이해받기 위해 말을 고르고, 선을 지운 채로 섞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유리창의 경계는 분명했고, 그는 그 선 위에 서 있었다.


그때, 그의 안쪽 어딘가에서 조용한 감각이 고개를 들었다. 흰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그것은 크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았지만 분명히 서 있었다. 다가오지 못하게 만드는 기척. 그는 그 감각이 무엇인지 곧 알아차렸다. 이제는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두지 않을지 구분해야 한다는 것과 모든 것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선명해졌다.



선은 무엇인가를 밀어내기 위해 그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남겨둔 자리였고 비로소 그는 감춰뒀던 감정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것은 오래된 슬픔이었으며 동시에 숨이 트이는 듯한 후련함이었다. 누군가를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새로운 감각이었던걸까.



그는 창밖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바깥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고,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흰 기척이 그의 곁에 조용히 서 있었다. 공격하지도, 으르렁대지도 않지만 필요하다면 물러서지 않을 존재처럼.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지키는 태도를 배워가고 있었다.





이 브런치북은 소설도 에세이도 아닌, 마음의 창에서 꺼내온 감각을 적어 내려간 기록입니다.

‘그 사람’을 따라가며 자신의 감각이 머무는 지점을 천천히 느껴보셔도 좋겠습니다.


월요일 연재
이전 09화그 사람은 조용히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