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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별 Feb 18. 2023

대천 이야기

명과 암

대천에 왔다. 우리 회사는 1년에 통상 열흘의 휴가를 쓰게 되어 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애들이 방학하고 다들 휴가를 가는 시기, 즉 휴가철에 맞춰 계획을 세운다. 회사도 그 시기가 오면  직원 복지 차원에서 전국의 휴양지에 숙박시설을 확보해 놓고 추첨을 통해 배정을 한다. 나도 애들이 어릴 때 한번 당첨이 되어서, 대천을 온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지금, 나는 한 겨울에 휴가를 내고 대천에 왔다. 휴가를 거의 못 쓰고 남은 휴가를 연말에 몰아서 등록했다. 그리고 무작정 떠난 곳이 대천이다. 2박 3일의 일정을 다 보내지도 못하고 일 때문에 부랴부랴 복귀했다. 그래서 이번 대천 여행은 1박 2일이 되었다.

우리 회사는 대천에 연수원을 보유하고 있다. 예전에 당첨되었던 숙박시설이 바로 대천연수원이다. 나는 1999년 대천연수원이 문을 여는 날, 현장에 있었다. 그때 나는 일산에 있는 연수원 본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개원식에 맞춰 '신임 지점장 과정'을 개설했고, 과정 중 2박 3일을 대천연수원에서 진행했다. 상당히 높은 경영진들이 와서 개원식 행사를 성대히 개최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새로 지점장으로 승진하신 분들은 아직 20대였던 내 눈에 거의 할아버지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제 내가 그 위치에 있고, 그분들은 퇴직하고 없다. 흘러간 세월도 세월이지만, 지금 나를 바라보는 젊은 직원들의 느낌도 그때 나와 같겠구나 생각하면, 행동거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충남 보령에 대천해수욕장이 있고, 머드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방송에도 나오고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것 같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대천해수욕장은 가수 이수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작지만 아픈 기억이 있는데, 대천연수원 개원식 날 만찬이 횟집에서 있었, 내 책임 중 하나가 식당에 양주 1병을 챙겨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일로 정신이 없던 와중에 그 일을 깜빡 잊고 말았다. 식당도 연수원에서 좀 거리가 있는 곳이어서 다시 가서 가져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일로 크게 혼이 났다. 혼이 나면서 자책감도 들었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혼날 일인지는 아직도 좀 의문이다. 그 횟집은 오천항에 위치해 있었다.

오천항에 있는 충청수영성.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촬영했던 장소란다.

이번에도 오천항을 찾았다. 수영성에 올라 내려다본 바다는 옅은 해무 속에 고요하고, 수영 관아에 지어진 영보정은 한겨울의 차가운 습기를 머금고 묵직하게 서있었다. 20여 년 전 담당 차장에게 혼이 나고 있는 젊은 은행원과, 대천 앞바다에서 삼십 대 아빠가 2만 원 주고 구입한 고무보트를 타고 즐거워하던 두 아들의 모습과, 그 둘을 자기보다 키가 큰 사내들로 키워낸 아내 옆에 또 일 년을 버텨낸 나이 오십 중년 사내가, 여기 대천에 있다.

수영성 영보정에서 내려다본 오천항

일에 '쫓겨' 문자그대로 '쫓기듯이' 올라와야 지만, 휴가다운 휴가를 쓰지도 못 한 나에게는 꿀 같은 시간이었다. 세상은 복잡하다. 남들처럼 일하고 놀고 해도 잘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들과 달리 많은 노력과 희생을 해도 잘 안되는 사람이 있다. 또 남들과 다른 특별한 노력을 해야만 겨우겨우 따라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인지 항상 자문하게 된다. 대천에 와서 작은 힌트라도 하나 얻어가는 것 같다. 또 한번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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