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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별 Sep 14. 2023

아버지의 기차 여행

한여름 논두렁 그리고 아버지의 어머니

"70년도 넘은 일이 생각이 났다. 논길을 따라 콩을 심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는 여든이 넘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삼십 대인지, 사십 대인지,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 자신이 아버지가 된 후에야 아버지의 나이를 실감하며 환갑이라는 행사를 치렀다. 그리고 칠순, 이 년 전 팔순, 이번엔 여든둘이라는 연세로 아버지는 서울역에 도착했다. 내년에 팔순을 맞이하는 어머니와 함께. 며느리는 몇 시간씩 걸리는 경부선 기차를 그 연세의 어르신들이 타고 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생각이 상식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부모님은 멀쩡하게 서울역에 나타다. 새삼 두 분의 건강함에 감사드리는 마음이 들었다.

 

작은아들, 즉 아버지의 작은손자는 강원도 화천에서 군복무 중이다. 나와 아내는 아들 면회가 아니면 평생 가볼 일이 없었을 화천이라는 곳에 여러 번 갔었다. 이번에는 부모님까지 함께 하는 계획을 세워 여름휴가를 대신해 화천에 가게 된 것이다. 큰아들, 즉 아버지의 큰손자까지 모두 다섯 명이 한 차에 타고 출발하니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불평 없이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군부대로 향했다. 논길을 따라 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풍경을 보며 우리는 달렸다. 예전에 우리 살던 얘기도 하고, 예전에 옆집 살던 누구누구 얘기도 하고, 예전에 내가 엄마를 실망시켰던 얘기도 하고, 아빠의 자랑이었을 얘기도 하며, 그렇게 우리는 지방도로를 달렸다.


위병소 앞에서 반가운 아들을 만나고, 아직도 월급을 받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지갑에서 나온 돈으로 소고기도 사 먹고, 작은 로컬 극장에서 팝콘과 콜라를 곁들여 영화도 보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항상 말 앞에 '언제 우리가 이렇게'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강원도 화천에서 같이 밥을 먹냐, 언제 우리가 이렇게 군인 아저씨 위문공연을 같이 와보겠냐, 언제 우리가 이렇게, 언제 우리가... 그렇다. 시간은 하릴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언제 이렇게 다시 모일지 모르는 것이다.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 먼 길을 나선 것이리라.


작은아들이 먹고 싶어 하는 햄버거 가게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군장교 출신인 아버지는 어린 줄만 알았던 손자들이 군대생활을 잘해나가는 모습이 무척 자랑스럽다고 했다. 또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화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 아들 며느리가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기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보며 어머니, 즉 나의 할머니가 떠올랐다고 했다.


우리 집안에서 나의 할머니는 매우 추앙받는 분이다. '장한 어머니 상'이라는 나라가 주는 상도 받았다고 한다. 세세한 내용까지는 모르지만 우리 할머니는 시집 온 집안이 지속가능한 성장동력이 없는 집안이라고 판단하고, 남편을 남겨둔 채 자식만 데리고 대처인 부산으로 이주를 감행했다고 한다. 한자의 어순을 약간 바꾸어 부창부수(隨)라고 했던가. 곧이어 나의 할아버지는 가족이 있는 부산으로 왔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며 부부간에 집안을 일구고, 삼 형제를 키웠다. 우리 아버지는 막내아들이다. 형들이 공부하고 일할 때 어머니가 데리고 다니며 논일 밭일을 같이 하던 그런 아들이다.


70여 년 전 부산진구 가야동,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 논길을, 모시적삼에 수건을 둘러쓴 엄마와 까까머리 어린 아들이 호미와 괭이를 들고 걷고 있다. 까불까불 장난을 치며 걷는 아들을 엄마는 나무라지만, 잠시 멈췄다 이내 다시 장난을 치는 아들을 보며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땀이 비 오듯 하는 가운데, 엄마가 괭이자루로 논둑을 콕 찍어 구멍을 내면 아들이 콩 한 알을 쏙 집어넣는다. 콩, 쏙, 콩, 쏙. 지루한 노동이지만 그들은 말없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콩을 심는다. 모자라는 쌀대신 가마솥의 빈부분을 채워줄 귀한 콩이다. 메주도 쑤고 장도 담글 귀한 콩이다. 몇 번을 그렇게 함께 콩을 심었을 엄마와 아들은 이제 서로 만날 수 없다. 그때 엄마보다 더 나이 든 아들은 군에 간 손자 면회를 가던 기차 창 밖 풍경에서 엄마를 만난다. 파란 하늘과 뜨거운 태양과, 파란 논과 텅 빈 논두렁.

   

반백의 아들은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아들에게, 손자에게 엄마와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며 이야기를 전한다. 그렇게 하나의 옛날이야기가 탄생한다. 혹 손자들이 나중에 이 이야기를 떠올린다면 그 아들들에게 들려줄 날도 오지 않을까? 강원도 화천에서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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