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없는 후기
오랜만에 미세먼지와 황사도 없고, 날씨도 너무 좋았어서 퇴근 후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미나리>는 개봉 때부터 보고 싶어서 벼르고 있었던 영화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인 윤여정 선생님이 나오시기도 하고, 오스카 상의 각종 부분에서 후보로 오르는 걸 보면서 영화관에서 내리기 전에 꼭 봐야겠단 생각을 했더란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줄거리나 컨셉, 심지어 영화 장르까지 아무런 정보 없이 보는 것을 좋아한다. 무지가 편견 없이 채워질 때 느껴지는 포만감이 제법 신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나리도 오스카 상에 대한 소식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보게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영화관에 있던 관객 모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쩌면 다이나믹한 기승전결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미나리의 결말은 꽤 당황스러웠으리라.
어쩌면 결말이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것조차 미나리스러웠다.
미나리 후기를 몇 개 찾아보니, '담백하다, 편안하다, 재미는 없다.' 등의 평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나도 다들 좋다고 하니까, 오스카 후보도 올랐으니까 나도 좋다고 느껴야 되나- 싶었다. 확실히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었으며, 그것을 기대했다면 오히려 지루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어떤 점이 인상 깊었어?라고 묻는다면
먼저, 상반되는 성격의 캐릭터들이 인상 깊었다.
하고 싶은 것은 해야만 하고 이상적인 꿈을 맹목적으로 좇는 사람과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 영화에서 나타나는 갈등은 대부분 이 둘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옳고, 더 낫다고 볼 수 있을까. 나는 무의식 중에 누구의 편에 서서 영화를 보고 있었을까.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을 든든하게 채워주셨던 외할머니가 자꾸 생각났다.
유년기부터 학창 시절까지, 부모님보다 더 많은 시간 나를 돌봐주셨던 나의 할머니는 햇수로 4년 전 암과 치매로 돌아가셨다. 슬픔과 공허함, 죄책감과 좌절감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는 할머니와의 추억들이 더 도란도란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미나리에 나오는, 이름조차 없던 그냥 '할머니' 역의 윤여정 선생님을 보면서 할머니가 어른거렸다. 보고 싶은 나의 할머니.
무엇보다, 삶을 곱씹게 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란 무엇일까. 화려한 삶, 성공한 삶, 멋진 삶.. 이런 추상적인 단어들이 감히 삶을 정의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은 가끔은 피하지 못할 비가 내리기도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며, 모든 것을 잃는 좌절을 마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이토록 연약한 삶을 사는 우리는, 삶에게 다시금 위로받고 답을 발견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아무렴 삶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리라.
아무튼, 원더풀 미나리!
후기를 다 적고 나니 작년에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함께 올렸던 글 한 편이 생각나 한 번 더 적고 마무리하려 한다.
가끔 꽤 삶은 잔인해서
목놓아 우는 우리의 바닥에 발자국 조차 남기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우리는 우릴 홀로 남겨둔 삶에게 답을 얻곤 한다.
삶에 엉기어 살지만 삶이 주는 선물에 흠뻑 취해 살 수밖에 없는, 한 자락 인생
임지은 (@filmbyjieun)
송도해변, 2020.05
( 원본 글 : https://www.instagram.com/p/CD3SwWxsTN8/?igshid=ivakuvogzm6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