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에 마련된 책장에서 감각의 기록물을 꺼내 읽다.
후두둑후두둑..
비가 예의를 가지런히 차리고 창문을 천연덕스럽게 두드리기 시작하면 정겹고 평안하게 마음이 정돈된다. 비가 오면 노릇하게 튀기듯 부쳐진 전을 호호 불어 아그작 오물오물 먹을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탁월한 어두침침함 덕분이려나. 별안간 그이는 예측할 수 없는 순간 들이닥치지만 하나도 무례하지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집에서 그를 맞이할 때로 한정되기는 한다. 추적하게 비가 오는 날 빽빽한 만원 버스를 타고 가쁜 호흡들과 함께 퇴근하는 건 도무지 최악이 아닐 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차의 온기를 꽉 쥐고 있는 머그컵을 선반에 포근히 올려놓고 책을 읽으면 그 날의 힐링은 목욕을 다녀온 듯 말끔하고 개운하게 마무리된다.
이외에도 빗소리가 가지고 있는 기능은 다양한데 그 날의 감정선의 변화를 반영하고는 한다. 기분이 홀가분한 날에는 비가 뚝뚝 떨어지는 경쾌함이 가슴 벅찬 심장박동과 맞아떨어진다. 반대로 영 꽝인 날에는 워낙 세상만사가 별로여서 하늘이 대신 울어주기도 한다. 물의 외형 변화가 자유롭기에 그저 현상을 표현하는 말인 비는 본질의 속성을 따라 감정을 맞춰가는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 같다.
상처에 대한 방어기제로 나타나는 사람들을 애써 외면하는 의지와 인간의 연약함에서 동반되는 소외를 원치않는 희망의 동거는 대개 부정적인 감정에 연결되기 마련이다. 즉, 악순환의 반복은 예견되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그 날도 홀로 방 안에 있었다.
방은 학생들이 지나다니는 삭막한 콘크리트 계단의 옆으로 그들의 발과 고도를 나란히 하는 곳이었다. 후문으로 통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기에 다양한 학과의 풍문을 때때로 수집할 수 있기도 했다(-물론 관심도, 재미도 없는 반강제였지만). 당시는 꽤나 경치가 볼품없다 했지만 이제 보니 그대로의 운치를 지닌 곳이기는 했던 것 같다.
어김없이 노트북으로 TV 프로그램이 기계적 신호로 증폭되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곳에는 목소리는 있지만 온기는 없었다. 그리고 저마다의 관계로 이루어진 목소리가 창문을 타고 넘어왔는데 거기에는 온기가 조금 담겨 있었다. 체온섞인 감정을 교류한지 꽤나 오래되어 더이상 혼자여도 괜찮다고 하기 벅찬 상태였나보다. TV와 창문 밖의 목소리가 주는 참신한 차이에서 괜한 서글픔이 마음에 우글거렸다.
울고 싶지만 울고 싶지 않았다. 선택적 소외에 책임을 지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토독. 토도독. 토도도도독. 후두두두두둑.
처음에는 분명히 창문을 두드린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나서는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아마도 그 소리가 눈물 방울의 떨어짐과 부딪힘이라 판단한 것 같다. 대신 울어주는 존재 자체가 필요했을 뿐(-자신만의 우직한 착각이라도)이지 딱히 존재의 성격을 규명하고 싶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으니까.
위로부터 떨어지는 대성통곡은 공기와 한참을 접촉한 뒤에야 땅에서 울려퍼졌는데, 침침한 잿빛 하늘을 보니 그것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보였다. 가정을 지켜내고자 애쓰는 가장으로서의 아버지가 참아왔던 눈물을 쏟으면 그 정도의 양이 되지 않을까 했다. 그정도로 우울한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시원하게 한 바가지 쏟아내는 걸 듣고있으니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뒤로는 한동안 사람들과 자주 만났다. 그러지 않고는 비에게 미안할 것 같았다. 이후로 지금까지 이따금 빗소리를 들을 때면 유연하게 목소리를 내놓고 싶다. 체온 섞인 말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기도 하다. 나처럼 고요한 한기에 감싸인 이들이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