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첫사랑과 끝사랑 사이 어딘가(소설)
“근데 너 혹시 스킨십 해본 적 있어?”
“스킨십? 어떤 거? 키스?”
난 그저 스킨십을 물어봤는데 나라는 키스로 대답했다. 마치 구구단을 물어봤는데 미적분을 알려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장유준! 너 누구랑 키스하고 싶어? 혹시... 라영이?”
눈맞춤 세계에서도 나라는 거침이 없다. 스킨십이라는 단어 하나에 나라는 라영이까지 말하고 있다.
선생의 기본은 눈맞춤 교육이거늘, 나라는 선생의 기본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고등학생에게 15금이 아닌 18금을 이야기하려 한다.
“무슨 키스씩이나... 그냥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예를 들면... 손을 잡는다거나 그런...”
사실 내 얼굴에 이 나이가 되도록 여자를 한 번도 안 사귀어봤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건 안다. 하지만 사실이다.
엄마의 혹독한 주입식 교육의 영향이 크다.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엄마는 대학교 갈 때까지 여자친구는 절대 안 된다고 수백번을 강조했다.
그 덕분인지 중학교 때는 여자친구라는 것을 정말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남학교라 애초에 학교에는 상대가 존재하지 않았고, 엄마는 학원조차 남자들만 있는 곳을 보냈으니까.
하지만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오면서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1학년 때는 별생각 없이 잘 보냈는데 2학년이 되고 나서 달라졌다. 학기 초반부터 나에게 호감을 보여줬던 미래와 내가 첫눈에 반했던 라영이와 한 반에서 같이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기고 상상을 해보게 됐다.
라영이의 손을 잡아 보면 어떤 기분일까... 라영이와 둘이 영화를 보러 간다면..?
이런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한 번씩 파고들었다.
미래와 효석이가 사귀었던 건 아닐까..? 둘이 팔짱끼고 그 고급스러운 단지 안을 걸어다녔을까..?
상상 속에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궁금했지만 딱히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내 왼팔인 영만이는 애초에 짝사랑 전문가였고, 내 오른팔인 정혁이는 닭가슴살 외에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으니까.
라영이도, 미래도 누구를 사귀어 본 것 같진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다 평범하게 학교 생활 하고 있는데 나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나 죄책감이 들 때도 있었다. 공부는 안하고 이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는 내 존재를 엄마에게 들키는 망상은 자주 했다.
그래서 마침 우연히 나라와 눈맞춤 세계에 들어왔으니 용기를 내서 물어본 거다. 나라는 뭔가 다 알고 다 해봤을 것 같으니까. 나라가 말로는 정혁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지만 작년에만 남자친구를 3번이나 바꾼 걸 전교생이 알고 있다.
“푸하하하! 손 잡는 느낌이 궁금하다고? 키스도 아니고? 와! 장유준이 이렇게 순진한 줄 몰랐네. 그럼 이 누나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볼래?”
나라는 윙크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아... 괜한 질문을 했다.
그래도 어차피 아무도 기억을 못 할 것 같으니까 한 번 잡아나 볼까..? 나라의 손이 생각보다 고운데..?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꿈틀대던 순간 내 뒤에 있던 어떤 강렬한 눈빛이 느껴졌다.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눈맞춤 세계는 끝나 있었다.
그리고 내 뒤에는 라영이가 앉아 있었다. 기분 탓이였나...
내가 라영이와 처음으로 눈맞춤 세계에 들어갔지만, 내 할 말을 제대로 다 못 한 건 이날의 강렬한 눈빛의 기억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자! 조용조용! 다들 자리에 앉아봐! 임병달! 넌 대체 언제 정신차릴래? 빨리 자리에 앉아!"
아침부터 담임은 우리에게 익숙한 짜증을 냈다.
"오늘 우리 반에 전학생이 왔다. 우리 학교에 전학생이 오는 게 정말 오랜만인데 마침 또 우리 반에 왔으니까 친하게들 지내도록!”
담임 옆에는 다소 이국적으로 생긴 남자애가 서 있었다. 머리는 금발이었고, 얼굴은 길쭉했으며 키는 정혁이만큼 커 보였다. 피부는 창백한 느낌이랄까.
“Hi, 반가워! 난 미국에서 온 Robert라고 해. My Korean name is 승필. Nice to meet you, everybody!”
전학생은 짧은 문장에도 영어를 많이 섞어서 쓰고 있었다.
“내가 한국말 듣는 건 다 understand 하는데, 아직 말하는 건 clumsy 해. Welcome 부탁해!”
“clumsy가 뭐야?”
내 앞에 앉은 영만이는 눈치 없이 뒤로 돌아 내게 물어봤다.
“어설프다고.”
“아...”
“Robert! 일단 저기 창가 쪽 가장 뒷자리에 앉아. 며칠 뒤에 자리 바꾸니까 그때 원하는 자리 choose 하도록 해. OK?”
담임은 자기도 영어 단어를 문장 속에 넣었다는 뿌듯함에 취한 표정으로 전학생에게 이야기했다. 전학생은 담임이 지정한 자리로 걸어가는데, 그 자태가 놀라웠다. 정혁이가 파이터 느낌이라면, 전학생은 모델 느낌이랄까. 어깨가 딱 벌어진 건 정혁이와 전학생의 확실한 공통점이다.
담임이 나가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전학생에게 달려간 건 나라였다. 이런 건 우리 반에서, 아니 전교에서 나라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Hello, Hi!”
“나 한국말 all understand! Speak Korean if you want.”
"나라야! 네가 원하면 한국말로 하래."
눈치 없는 영만이는 나라 옆에 쪼르르 따라가서 통역이란 걸 하고 있다. 영만이가 아는 단어만 나왔나 보다.
“맞다! 한국말 다 알아먹는다고 했지. 그럼 난 한국말로 할게! Robert!”
나를 포함한 우리 반의 많은 애들은 나라와 전학생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언제나 새로운 사람이 오면 궁금하기도 하고, 경계하기도 한다. 특히 이 전학생은 이국적인 외모와 비주얼이 남자로서 본능적으로 궁금증보다는 경계심을 갖게 한다.
“미국 어디에서 살다 왔어?”
“LA.”
“근데 한국에는 왜 온 거야? 부모님 따라서?”
“No. For the star. 아이돌.”
“아이돌이라고?!”
전학생에게 관심 없는 척, 나라가 하는 말을 안 듣는 척하던 여자애들도 아이돌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나라는 이미 엄청난 점프를 한 번 보여줬고.
“대박! 미쳤다 미쳤어! 기획사 들어갔어?”
“No, 나 안 미쳤어.”
전학생은 갑자기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라를 노려봤다.
“아! 미안 미안! 내가 방금 말한 미쳤다는 ‘crazy’의 의미가 아니라 무슨 의미냐면... 그러니까 ‘crazy’가 맞는데... 영어 어렵네. Anyway 어쨌든 널 나쁘게 말하려는 것이 아니야. 네가 대단하다는 그런 의미야!”
나라는 당황스럽다는 듯이 과장된 몸짓을 섞어 가며 대답했다.
“그럼 OK.”
전학생은 웃으면서 나라에게 손을 내밀었고 나라는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와! 손 진짜 크다! 근데... 혹시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부모님이 모두 한국 사람?”
“No. 아빠는 미국 사람. I’m Mixed blood.”
“믹스드 블러드는 또 뭐야?”
어느새 내 옆에 딱 붙어 앉아있는 영만이는 그새를 못 참고 또 내게 물어봤다. 아까 신나서 한마디 할 때는 언제고 바로 한계에 부딪혔나 보다.
“혼혈이라고.”
나는 전학생의 말투와 표정, 몸짓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영만이의 질문에는 꼬박꼬박 대답해 줬다.
“지금 아이돌 준비하고 있는 거야?”
“Yes.”
“진짜 멋있다! 학교 생활 관련해서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나한테 물어봐. 내가 도와주고 다 해결해 줄게. 넌 그저 연습에 집중해서 빨리 데뷔하는 거야. 알겠지?”
나라는 이제 얼굴 본 지 겨우 5분 정도밖에 안 된 애한테 이런 극진한 친절을 베푸는 이유가 뭔지 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