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곧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 시기이고
이것저것 할 일은 많은데 난 여전히 무기력했고
억지로 억지로 모든 것의 의미를 부여하며 활기차보려고 애써보았지만
마지노선까지 늘어져있다가도 뭔가 하나는 시작하는 듯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계속되었고
멍하게 이것저것 보고만 있다가
세로토닌이라는 것을 활성화시켜 우울증을 없애준다는 제법 비싼 영양제도 먹어봤는데
효과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수면패턴은 언제가부터 14시간쯤 자고 이틀을 깨어있는 상태로 지속됐다.
아무리 몸을 혹사시켜도
책을 읽어도 커피를 끊고 과식을 해서 포만감에 잠이 들려고 해도
잠들기까지는 오래 걸리고 잠이 들고나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악몽을 꾸거나 몸이 쑤욱 아래로 꺼지는 느낌과 함께 깨어나고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어질어질한 상태로 다시 잠이 깨거나, 잠들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잠이 깨고 다시 잠들지 못해 또 꼬박 밤을 새운다.
밤낮이 바뀌더라도 졸음이 오면 무조건 자야지 했던 것도 한 달 이상이 되자
이젠 낮에자도 금세 깨서 다음날 새벽까지 잠이 안 오고 아침이 되어도 머리만 아프고 컨디션은 바닥을 쳤다.
혈압도 급격히 낮아지는지 어지럼증까지 심해졌다.
하루 잠을 잘 자고 나면 그렇게 몸이 가벼울 수가 없었지만 정말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수면제 처방을 받아 억지로라도 시간 맞춰 잠을 자려고 했다.
집 주변 내과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수면장애를 전문으로 본다는 신경정신과를 발견했고
어차피 내과도 수면제 처방을 위해 가려고 한 거니 이왕이면 수면장애전문이라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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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신경정신과에 들른 나는
첫 진료는 기계로 뭔가 검사해야 한다길래 한번 해봤다.
머리에 차가운 쇠 재질에 센서가 부착된 띠를 두르고 양손에 차가운 쇠봉을 잡고 가만히 있으면
눈앞에서 기계가 글씨와 그래프를 슥슥 그려댔다.
알 수 없는 그래프와 글씨가 쓰이고
이 기계가 얼마나 내 정신상태를 잘 읽나 궁금했다.
상담을 하러 들어가서 의사분께 인사를 하고 뱉은 첫마디는
"잠을 잘 못 자서 그걸 좀 고치려고 왔어요"
였는데... 내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대해 한참을 설명 들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원인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었다.
나이가 많은 아저씨 의사분은 사실 조금 윽박지르듯이 말하는 성향이 있었고
내 말을 잘 잘라서 본인이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잠만 잘 잘 수 있게 해 달라는 내 부탁에 수면제는 일시적인 방편이고 수면제가 없어도 잠을 잘 자고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나고 또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차근차근 고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한참을 설명했는데
사실 그냥 꼰대가 하는 말 같았다.
하아...
또 눈물이 났다.
뭔가 눈물이 이제는 마른 줄 알았는데
그래도 역시 의사는 의사인지라 그분이 이끄는 뭔가가 있었나 보다.
속 이야기를 조금 꺼내고 너무 더워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이것저것 체크하고
그리고 약처방을 받았다.
우울증은 질병이니 약으로 고쳐야 한다고
날 설득시켰고
잠이라도 제대로 잤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으로 난 그 약을 먹기 시작했다.
저녁 약은 잠자기 한 시간 전에 복용해야 하는데
잘 준비를 끝내놓고 약을 먹으면 약.. 30분 후부터 정신이 몽롱 해진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약간 하다가 잠이 안 올 때부터 잠을 자기 위해 들었던 편안한 소리를 플레이해놓고 등을 돌리는 순간 잠이 든 것 같다.
이런 적은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며칠밤을 눈을 뜨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저 스스륵 잠들었다.
아침이 개운하진 않았다.
아침약은 생각보다 별 효과가 없나 싶었지만
아침약을 먹은 지 이틀이 되자
그동안 미뤘던 내 방청소와 냉장고 청소, 그리고 묵은 빨래까지 다 해버리고 강아지 목욕까지 시킨걸 보니
약이 효과가 있나 싶다.
사실 잠을 잘 자게 된 것 말고 약의 효과는 잘 모르겠다.
하긴 이게 제일 큰 효과이자 만족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얼굴에 선크림만 바르고 물 한잔 마시고 바로 산책을 하는 것으로 잠을 깨고 있다.
기분도 나아지고 강아지도 좋아한다.
더워서 힘들긴 해도 5년이 넘게 다이어트를 한다고 마음만 먹었는데 이번엔 제대로 하는 중이라 오히려 도움이 된다.
5일 간격을 두고 약의 용량을 테스트했다.
다시 들른 병원에선 첫 상담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눴고
여전히 조금은 앞서 내 말을 자르고 결론을 내시기는 하지만 첫 상담보다는 좋았다.
저녁약은 그대로 아침약은 반알에서 한알로 용량이 바뀌었다.
이렇게 앞으로 두 달 정도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받아야 하고 약은 꽤 오랫동안 먹어야 한다고 한다.
결심하고 시작한 게 아니지만 친구들도 만나고 싶어 졌고 자꾸만 밖에 나가고 싶다.
사야 할 것이 한가득인데 그저 바라만 보던 버릇도 고쳐져서 그동안 사야 했지만 미루고 미뤘던 물품들도 하나씩 구입하고 무엇보다 무기력으로 인해 교환하지 못했던 물건들도 교환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미루고 있는 두 가지는
운동과 공부
왜 이렇게 하기 싫은지....
그래도 이건 우울증이나 무기력증이 있는 사람들 말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루고 싶어 하는 것이니까...........
그래도 해야지..
그래도 해 내야지...
앞으로 차근차근 더 나아지길 바란다.
우울증으로 아무것도 못했던 내가,
말도 조금 더듬거리기 시작했던 말 잘하고 말 많았던 내가
다시 즐거워지길 바란다.
그리고 늦었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에게 집중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다.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나보다 남을 신경 써서 억지로 행동하지도 않고
어차피 그래봤자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내가 이상한 사람이 돼버린 경험은 너무 많이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