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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치 Mar 19. 2022

당장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지난주 강의 주제는 젠더, 성, 문화였다. 교재 내용상 자연선택설과 적자생존에 관해 강의해야 하는 데 나는 그 개념들을 믿지 않는다. 또한 성 정체성이나 성적 취향으로서 차별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내가 이 주제로 강의할 자격이 있나 하는 조바심도 있다. 


성 역할 (gender role)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영상 자료를 준비했다. 'No Homo'라는 말은 미국에서 남성들 사이에 소통을 할 때 성적 의도가 없음을 강조할 때 쓰이는 말이다. 미국의 10대에서 20대 남성들 사이에 외로움이 유행병처럼 돌고 있는데 감정적 교류를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기거나 동성애적인 행동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연구가 있다. 영상에서는 소년들이 사춘기를 거치면서 친구들과 깊고 친밀한 대화나 교감을 나누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느낀다는 인터뷰를 담았다. 다른 학생들은 진지하게 영상을 시청하는 반면 남학생들은 종종 웃음을 터뜨렸다. 영상이 끝나고 그들에게 영상의 어떤 부분이 웃긴지 물었다. 


누군가가 'no homo'라는 표현을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이거나 동성애자로 의심되는 친구가 성적 긴장감을 조성하려고 할 때 자기 방어 표현으로 쓴다는 것이었다. 혹은 같은 남성끼리 외적인 모습을 칭찬할 때, 다른 의도로 해석되지 않기 위해서 쓴다고 했다. 인내심의 한계점에 이른 나는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너희가 두려운 것은 동성애자로 오해를 받는 게 아니야, 동성애자로 오해를 받았을 때 괴롭힘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두려운 거지. 강의실에 있던 여학생들도 발언을 한 남학생들을 힐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고해성사가 시작되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no homo라는 얘기를 듣지 않기 위해서 밖에서 바나나도 맘 편히 못 먹는다고, 바나나 껍질을 까서 입으로 먹지 않고 바나나를 부러뜨려서 먹는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남학생들이 공감의 탄식을 뱉었다. 어떤 이는 오해를 살까 봐 핫도그도 반으로 잘라먹는다고 얘기했다. 나름의 억울한 얼굴들을 보고 나는 다소 누그러졌다. 혐오로부터 오는 사회적 억압은 혐오 대상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또 스스로를 억압하는 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그 담론을 곧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정확히는 "please don't subscribe to the belief or knowledge that can be weaponized against you.") 


강의가 끝난 후 일주일 내내 나는 이 말을 후회했다. 


대학교 3학년 때 1년 반을 휴학하고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일을 한 적이 있다. 신원 확인 이상의 면접을 본 것이 그때 처음이었다. 면접관들을 대게 40, 50대 남성들이었다. 면접을 보러 다니던 당시, 나 또한 면접관이라고 생각했다. 그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도 다니지 않을 생각으로 임했기에 딱히 면접관들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시기 면접관들에게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였다.  


한 달 정도를 면접관들과 싸우고 집에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나니 깨달음을 얻었다. 면접관들을 '썸'처럼 대해야 하는구나. 버스 광고판에서 보던 일타 강사와 같은 용모로 단장을 하고 눈빛으로 없는 꿀도 짜내며 6개월 이상 할 거라고 뻥을 치자, 어려 보이지 않게 화장 좀 더 진하게 하세요, 라는 말과 함께 바로 취직이 됐다. 첫 출근을 한 날 나는 데스크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놀라우리만치 비슷한 옷, 머리, 생김새를 보고 흠칫했다. 대한민국에 영어 잘하는 사람 널렸고, 단지 내 생김새가 면접관 취향이어서 뽑혔구나. 

 

그전까지 내가 지켰다고 생각한 것은 신념이 아닌 유복한 가정환경의 잔재였다. 당시 나에게 경제적 독립은 소망이었지, 생존의 문제가 아니었다. 학원의 매니저가 종종 내뱉는 성희롱이나 강요하는 옷차림이 억압이라는 것을 알았고 내가 그것을 오늘 저항한다고 당장은 커녕 가까운 미래에 나아지는 것은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 경험은 나에게 당장을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해 상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토요일은 협업하는 단체가 주최하는 행사를 도왔다. 단체의 정치적 목표와 방향성에 대해 설명하고 새로운 회원을 모집하는 자리였다. 그날은 하루 종일 눈보라가 쳐서 예상보다 적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에 다소 실망한 단체 사람이 발표를 하다가 분노를 터뜨렸다.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곧 재개발로 월세가 올라서 갈 곳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며 길거리에 나앉고 싶냐고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그는 자신이 한 때 노숙자 보호소에서 봉사를 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You can't have sex there. There is no privacy! Do you want that? 


전철로 30분 거리에 사는 외부 연구자인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기이한 엄숙함이 감돌았고, 어떤 결의에 찬 눈빛들을 봤다. 당사자성이 빚은 빛이었다.  


지난 2년간 강의를 하면서 어렴풋이 나는 학생들의 대다수가 당장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주일에 2시간짜리 강의는 그들의 삶의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 여러 가지 알바를 병행하면서 어린 형제나 자매, 가정 내에 환자나 노인들을 돌보기까지 했다. 임산부나 은퇴한 군인들도 몇 있었다. 사회 부조리에 대해 공부해서 돈을 버는 내가 마치 그들이 억압을 억압인 것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처럼 말을 한 것이 부끄러웠다. 나는 학생들에게 숙제로 '공공장소에서 부러뜨리지 않고 바나나 먹기'를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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