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무게, 하고 싶은 것, 제주섬의 카페 사장.
고등학교 2학년 때, 지금은 강남에서 가게를 차려 성황리에 운영 중인 한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너는 커피 향이 나게 생겼어." 빼빼 마른 바가지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나한테 말 건 친구는 참 잘생긴 흔히 말하는 '인싸 친구' 였는데, 그때만 해도 인싸들은 획기적인 방법으로 나를 놀린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 군대를 다녀온 그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장사와 사람, 그리고 공간'에 대한 욕구가 넘치는 즉, 나와 같은 부류의 친구였고 현재까지도 만나면 술과 사람 그리고 음악에 대해 새벽 내내 떠들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현장일부터 바텐더 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지만 유일하게 하지 않았던 일은 '카페 아르바이트'였다. 친구가 나에게 해 준 저 말이 잊히지 않아서일까, 성인이 되어서도 '내가 커피 향기가 난다고..?' 연신 속으로 되뇌며 카페 알바만은 손이 안 가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서울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연차를 쌓아 나가면서 '결국은, 커피를 한 잔 내려보지 못하고 30대를 맞이하겠구나, 앞으로 아르바이트할 일은 없으니까.' 생각이 들었다. 통칭 회사원으로 통용되는 직장생활은 "일"이라는 단어의 바운더리를 첨예하게 좁히는 역할을 한다. 역시 사람일은 함부로 단정 짓지 못한다고, 내가 다음 업으로 카페를 운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막연하게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제주도에서 카페나 하며 천천히 살아가고 싶다." 제주도의 선선한 공기와 맑은 바다 그리고 푸른 하늘까지. 이보다 커피가 어울리는 섬이 있을까?
제주에 온 지 햇수로 4년 차. 동업하는 파트너 대표님 그리고 멍멍이 두 마리와 함께 평화롭다 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저지리, 우리 매장이 들어설 곳 외벽에 프라이머를 칠하고 있었다. 바로 커피를 내리고 성공적인 장사 스토리가 나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동서남북 4면의 외벽에 우리가 원하는 색을 입히기 위해 3m를 올라가 밀대로 외벽을 칠하고 있었다.
8월 말 즈음이었나, 아직 더위가 가시기는커녕 태양은 제주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고. 해가 뜸과 동시에 세상은 이렇게 쉽게 따뜻해지는구나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새벽 6시에 매장에 나와 작업을 시작했다. 오전 7시쯤 떠오르는 태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뜨거웠고, 온몸에 덕지덕지 바른 선크림을 뚫고 침투했다.
네 면에 프라이머를 바르고 말리고, 세 번을 반복했다. 원하는 색상으로 덮기 위해. 우리가 직접 끝낸 작업의 견적을 처음 뽑았을 때, 왜 이렇게 비싼지 몰랐지만. 이젠 알 수 있지, 너무나 고되고 뜨겁고 힘든 일이었다는 걸. 지금까지도 직접 도포한 외벽을 보고 있으면 꽤나 뿌듯한 마음이 든다. 장사의 기본은 "직접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얗게 칠해진 건물 외벽을 보며 다음에 결정할 일은 무슨 색으로 칠할 것인가? 제주에 어울리는 색으로 해야 하나, 유행하는 펜톤 컬러로 해야 하나 혼자 칼라 북을 들고 씨름하던 그때, 서울 A대표님께 걸려온 전화 한 통에 고민은 녹듯이 사라졌다.
"주황색으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