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제주는 어떤 지역과 비교해도 낭만적이다. 하지만 겨울은,
영하의 날씨에 얼어붙은 손을 따듯한 콩나물 국에 갖다대고,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서울의 저들에게는 특별하지 않은 경험, 더 나아가 크리스마스라는 성스러운 날에 포장마차에 온 각자들이 비루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에게 이보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너가 가장 사랑하는 서울은 어떤 모습이니?' 실제로 듣고싶은 매우 감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이십여년을 서울에 살며 내가 가장 사랑한 공간은 어디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종로를 둘러싼 동네, 서촌과 평창동, 부암동 밑으로 청와대 옆 삼청동, 안국과 인사동 그리고 경복궁 앞 길.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공존하는 서울, 힙한 공간들이 가득 생기기도 하지만 여전히 어르신들이 배회하고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공간들이 즐비한 곳. 이 곳을 지나는 이들은 나에게 모두 평등한 듯 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두 시간 남기고 제주를 떠나 서울에 와서 내 색깔을 찾았냐고 물어본다면, 물론이다. 단 한 시간만에 256색의 파레트로 물감을 뿌리며 '이제 됐냐'는 듯한 모습으로 나를 채색했다. 크리스마스에 좋은 호텔에서 좋은 와인을 마시며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닌, 내가 사랑하고 동경했던 내 어릴적 기억하는 서울의 밤에 나와 똑같이 사랑스러운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들과 섞여 소주 한잔을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제주에서 마시는 한라산 소주는 무척 훌륭하다. 삼다수는 우리나라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를 대표하는 생수 브랜드라고 한다. 그 이름값 하는 에비앙하고 비교가 되곤 하는데 미네랄이 많고, 석회질이 적고, 뭐 두 생수 다 훌륭하다고 한다. 그 훌륭한 물로 만드는 한라산 소주는 치트키같은 제주의 맑고 청정한 브랜드 이미지를 덧입어 깔끔하고 깨끗한 소주를 대표하게 되었다. 물론 투명한 색의 유리병과 제주 바다를 닮은 파란색 라벨도 그 브랜드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아마 한 몫 단단히 했으리라.
이 글을 쓰면서도 웃기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언제 소주를 마시면서 '이게 물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마시지는 않는다는 말이지. 눈 앞에 맛있는 안주가 있으면 자연스레 한 잔 찾는게 소주이고, 겨울이 되어 얼어붙은 손과 발을 녹일 수 있게 식당에서 가장 먼저 대접해주는 콩나물 국을 보면 생각나는게 소주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 말을 재해석하면, 제주에서 소주가 주는 감성을 찾을 수 없기에 이 소주에 대해 논하면서 마신다고나 할까. 하여튼 참 이상하다.
제주는 몇 몇 지역(시내권)을 제외하고 20시 넘은 늦은 저녁 시간에 장사하는 가게를 찾기 힘들다. 바람이 많이 불고 야외 취식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서인지 포장마차를 찾아볼 수도 없다. 흔히 말하는 '노상' 을 찾으려면 바닷가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야 한다. 이는 특히 여름에 긍정적인데 여름의 늦은 밤, 탑동해안로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건 뚝섬유원지에서 마시는 맥주만큼이나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를 어째, 지금은 추운 겨울이다. 이 날씨에 탑동 해안로에는 맥주는 커녕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제주 한량의 겨울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 섬에 스스로 유배된지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겨울의 제주도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겨울의 제주도에 대해 생각할 것이 없으니, 이 소주가 얼마나 좋은 소주인지 알고 있는 것이지 고작 술인데 말이다.
포장마차는 많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공간이다. 혼자 깡소주를 기울이는 남성, 깔끔한 오피스룩에 우동을 들이키는 여성, 돈이 없어 삼삼오오 모여앉아 볼 벌겋게 부어대는 대학생들, 껍데기를 볶고 그 아래에서 꺼낸 멍게를 손질하는 이모, 눈시울을 적시는 누군가. 이 단편적인 기억들이야 말로 서울의 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문화라고 생각한다. 그 밤이 다 새도록 온기를 나누며 낮은 의자에 쪼그려 앉아 서로를 디깅하던 날들, 내 사랑하는 친구들과 감성을 논하며 이게 스무살이라고 했던 기억들, 분식에 마시는 소주가 이토록 어울렸는지를 깨닫게 해준 기억. 신촌, 홍대, 상봉, 영등포, 노량진. 익선동 참 감사한 기억들.
크리스마스에 가게를 열고 손님을 맞는 사람들은 참 감사한 사람들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빨간날의 마지막을 두 시간 남기고 기꺼이 포장마차를 열고 가득 손님을 맞은 익선동 포장마차 사장님께도 감사를 전한다. 가격은 조금 비쌌던 것 같지만 뭐 어떤가. 영하의 날씨에 얼어붙은 손을 따듯한 콩나물 국에 갖다대고,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함께 자리한 서울의 저들에게는 특별하지 않은 경험, 더 나아가 크리스마스라는 성스러운 날에 포장마차에 온 각자들이 비루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에게 이보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행복감에 젖어 유리잔을 부딛히며 짠 할때마다 작게 외쳤다.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