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된 딸은 이젠 내 치마폭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코로나 시대에 중학교에 입학해 일 년 동안 학교 수업과 바이올린 레슨을 화상 수업을 하면서 혼자서 수업을 듣고 혼자서 숙제를 하고 혼자서 노트를 적고 혼자서 연습을 하고 방에서 잘 안 나오기 시작했다. 3학년 때부터 스즈키식 바이올린 레슨을 듣던 우리는 선생님 부모 학생 삼각형 안에서 내가 한 꼭짓점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젠 튜닝도 혼자서 척척 해 내고, 끊어진 줄도 혼자서 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연습도 혼자서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삼각형에서 내가 빠저나가기 시작했다.
한때는 머리는 길면서 샤워를 하는 걸 안 좋아하고 얼굴엔 여드름이 잔뜩 났는데도 세수도 안 하고 잠이 들곤 해서 아빠가 샤워하라고 핀잔을 줬는데 요즘엔 알아서 매일매일 밤이 늦었더라도 샤워를 하는 걸 보면 정말 사춘기가 제대로 왔는가 보다. 여자 아이들은 외모에 신경 쓰고 매일 머리 감고 학교 갈 때 뭘 입고 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하면 사춘기란 말을 아빠에게 해 줬더니, "그러니? 남자애들은 그냥 뛰어놀다가 땀나면 찝찝해서 그냥 씻으니깐 어릴 적부터 늘 매일매일 샤워를 했어서 몰랐네." 그런다.
어릴 땐 성격이 느려서 ~할 시간이다 움직여라, 5분 전이다 준비해라 일일이 말해줘야 움직였는데 이젠 그럴 필요도 없게 되었다. 오히려 자기 스케줄을 나에게 보고 하며 리마인드 시켜주기까지 한다.
작년 생일선물로 친구에게 받은 수첩을 다이어리로 만들어 꾸미기 시작했는데 아이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다이어리를 보니 자기 관리를 이렇게 열심히 하는구나 싶어 대견하기도 하면서 약간은 무섭기도 하다.
말은 안 해도 학교 공부가 많아질수록 스트레스받는 날도 많은가 보다 9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어라고 말하지만 요즘은 9시가 되어서도 방에 불이 켜져 있는 날이 많다. 대부분은 숙제를 하고 있거나 자신이 세워놓은 목표( 책 읽기, 앱을 사용한 외국어 공부)를 다 채우지 못해서 그걸 마저 하고 자느라 잠자리에 들지 못한다. 92점만 넘으면 A를 받는데도 엑스트라 크레딧까지 모조리 다 해서 제출해야 속이 풀리는 성격이라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모든 걸 다 완벽히 하지 않아도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고 조언을 해 준다.
매일 감사한 것을 적어놓은 딸.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함을 찾을 줄 아는 모습이 예쁘다. 산에서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깎는다고 했던가.
매일 조금씩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걸 알려줬을 뿐인데 이젠 스스로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고 그걸 또 트레킹 해 나가는 모습에 놀랍다.
사실 우리 엄마가 나를 키울 때 엄마는 매일 밤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셨다. 9시에 미용실이 마치면 집에 와서 저녁을 차려 주시고 밥을 다 먹고 나면 설거지를 하고 다음 날 챙겨갈 도시락 반찬을 하시고 밀린 집안일을 하시고 밤 11시가 되어서라도 내 방에 오셔서 영어를 한 시간씩 가르쳐 주셨다. 내가 미국에 오기 전까지 하루도 빼지 않고. 설날이나 추석에 친척집에 가서라도 부엌에서 할 일을 다 끝내고 씻고 오셔선 챙겨 온 책으로 날 가르치셨다. 사촌들이랑 실컷 놀고 싶을 때 책을 꺼내면 그땐 여기까지 와서 이걸 해야 되나 싶어 참 싫었는데.
남편에게 제는 누굴 닮았길래 저러냐고 물으니 당연하다는 듯 자길 닮은 거란다. 중학교 때 너무 공부를 못해서 일단 책상 앞에 앉아있는 연습부터 하겠다 마음먹고 하루 2시간은 책상 앞에 정자세로 앉아 만화책을 보던 뭘 하던 앉아있는 연습부터 했단다. 방학 때도 계획을 세우고 자기가 할 분량의 공부를 다 해야만 밖에 나가서 놀기 시작했단다. 한국의 어머님에게 그 이야길 하니 남편이 그랬다고 증언을 해 주시니 정말 이런 꾸준함과 의지력은 아빠를 닮았나 보다.
사실 남편도 아이의 성격과 생활습관에 한몫을 한 것 같다. 원래 아침잠이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주말이든 휴일이든 상관없이 매일 정시에 일어나 아침운동을 하고 출근을 하고, 퇴근 후 저녁식사 이후엔 자기 계발을 위해 외국어를 공부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자연스레 보여줬다. 스키강습을 가서도 아이들은 한 시간짜리 수업 4회에 고급 코스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남편은 초보자용 코스에서 넘어지고 얼굴로 처박고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배우는 모습을 보여줬다.
소설 책에 테그를 해서 비교 하며 읽는 딸. 누가 보면 무슨 논문이라도 쓰는 줄... 작년과 재작년에 걸쳐 저 작가의 소설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생일선물로 그 작가가 쓴 소설책을 두 세트 선물해 줬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책 두 권을 저렇게 태그를 해서 읽고 있다.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두 책이 같은 시간적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각각 주인공이 달라 그들의 관점이 다르단다. 그래서 A의 입장과 B의 입장을 비교해 가며 읽기 위해 같은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 태그를 해 놓고 두 권을 옆에 두고 읽는 중이란다.
영화는 영상물 등급이 나누어져 있어 13세 이상 관람가 이상은 못 보게 하는데 책은 영화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전쟁, 살인, 사랑, 음모 등등) 나이 제한이 없어 좋단다. 그러면서 엄마가 자신이 읽고 있는 내용을 알면 놀랄 것 같으니 엄마는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런다. 작년에 팬덤과 팬픽션을 다루는 사이트를 알려주면서 너도 책의 삽화를 글을 읽고 상상해서 그려보던지 속편의 글을 써 보라고 추천했더니 학교 소설 글쓰기 클럽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스스로 알아보고 팬들이 영화를 제작하는 것을 알고 이메일로 연락을 해 신청을 하더니 영화 편집 작업팀에 같이 합류하기로 연락이 왔다며 자랑하며 회신 이메일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LA에서 영화를 찍는데 그곳까진 자기는 갈 수 없어 온라인으로 같이 일 할 수 있는 것을 신청했다고 한다.
딸이 3살 되었던 해에 나는 딸아이가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걸 눈치채고 우리가 돈은 없지만 내 시간과 노력으로 아이를 서포트 해 주고 싶어 직장을 그만두고 Stay-Home-Mom이 되었다. 아이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고 아무리 내가 먼저 공부하고 가서 기다리고 끌어주고 싶어도 이젠 아이가 먼저 내 역량을 벗어나 저 멀리 서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저렇게 날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난 뭘 해 줄 수 있을까?
따뜻한 밥을 챙겨주고 한 번 더 안아주고 안전하게 차를 운전해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는 것 그것 이외엔 내가 잘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