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ro Sep 29. 2020

학회 그 이상의 학회

2019년 5월 17일, 한국 시간으로 오후 10시 20분. 나는 지금 샌디에이고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경유지인 시애틀로 가고 있다. 샌디에이고에서 있을 Digestive Disease Week 참석을 위해서다.

의사 면허만 따고 나면 의사들도 공부가 끝난다고 많이들 생각하겠지만, 틀렸다. 의사들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공부를 계속한다. 의학은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고, 발전 중이며,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속도로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다. 의사 면허를 딸 당시의 지식으로만 평생 의사 노릇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대학병원 교수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의학의 최전선에서 항상 최신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다. 그것이, 매년 해외 학회를 빼놓지 않고 참석하는 이유이다.

올해는 DDW를 처음 가 보기로 했다. 매번 참석하던 ASCRS나 ESCP가 다소 식상해진 이유도 있고, 한편으로는 DDW같은 좀 더 큰 학회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샌디에이고라는 학회 개최지가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것만은 절대 아니다.


사실, 학회 참석의 또다른 큰 목적 중의 하나는, 재충전이다. 다른 어느 직업이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의사 노릇 하며 사는 것이 만만하지만은 않다. 외과의사로서, 대학병원 교수로서, 전공의들의 멘토로서, 두 아이의 아빠와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의 인생에는 휴식이 끼어들 틈이 없다. 당연히 지친다. 그래서 Refresh가 필요하다. 만사 잊고 다 비워낼 수 있는 혼자만의 여유. 조용히 생각도 하고, 글도 쓰고, 사람 구경도 하고, 누구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 곳에서 가지는 나만의 시간. 그것이 일 년에 한두 번 겨우 참석하는 해외 학회가 소중한 또 하나의 이유이다. 학회는 일상에 지쳐 이 짓거리도 더 이상은 못하겠다 싶을 때 훌쩍 떠나도 괜찮다는 타당한 명분을 제공해 주고, 나는 앞으로 한 열두 달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을 학회에서 얻어 온다.


이번에는 3년차 전공의를 하나 데리고 간다. 전문의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지도한 첫 번째 전공의다. 논문은 이미 SCI 잡지에 제출하여 리뷰 중이고, 초록 발표를 위해 동행한다. 구연발표가 아니라서 아쉬움이 있지만, DDW는 포스터 발표도 두 시간의 질의응답시간이 있다. 이번엔 기필코 질의응답 두 시간 동안 포스터 옆을 지키고 있어 볼 예정이다. 내 연구에 대해 누군가가 영어로 질문을 하면 거기에 유창하든 그렇지 못하든 답변을 하려는 시도를 해 보는 것만으로도 전공의에게는 충분히 좋은 경험이 될 터이다.


전공의 4년차 시절, 나도 내 논문 내용을 발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ESCP에 참석했었다. 석사 논문이었고 나름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내용이었지만 막상 세계 유수 연구자들 앞에서 발표를 하려니 내 논문은 내용이 너무 초라한 것 같고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라고 비웃음이라도 당할 것 같아 우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구연 발표였다. 청중 앞에서 발표를 하는 것쯤이야 무대 체질을 타고난 내가 걱정할 바는 아니었지만, 영어 발표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읽고 해석하는 것에 최적화된 입시 영어에만 익숙했던 나는 다른 수많은 한국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영어 울렁증이 있었다. 영어 발표라니! 유럽 학회에서 영어 발표라니!!

영어로 대본을 쓰고, 그야말로 달달 외웠다. 수술 중 잠깐 짬이 날 때도 외우고, 똥 누다가도 외우고, 자려고 누워 눈을 감고 또 외우고, 빈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도 외우고 또 외웠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계적으로 대본이 입에서 튀어나올 때까지 외웠다. 예상 질문 목록을 뽑아서 답변까지 미리 정해 두고 외웠다. 그래도 영어에 대한 불안감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누군가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하는 바람에 적당히 답변할 말을 영어로 생각해 내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해외 학회 같이 가자는 꼬임에 그저 놀러 간다는 생각으로 덥석 미끼를 물어 버린 것 같아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학회장에 도착하니 후회는 더 심해졌다. 내가 발표를 할 학회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섯 배쯤 넓었고, 수백 명의 대장항문외과 전문의들이 그 넓은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 양반들은 빈에 왔으면 관광도 좀 다니고 할 것이지 공부하려는 의지가 뭐 그리도 강해 이 좋은 날씨에 학회장에 처박혀 있누. 이들이 과연 내 영어 발음을 알아듣기나 할까? 개망신 당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도망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교수님 옆에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앉아 있는 사이 도망도 못 가고 내 발표 순서가 되어 버렸다.

단상에 서고 좌장이 내 소개를 하고 나자 좌중이 일순 조용해졌다. 수백 명의 눈이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 멀리 동쪽 끝 작은 나라에서 온 조그만 동양인의 영어 발표를 듣기 위해 다들 하나같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찰나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그렇게 긴장했던 건 대학교 면접시험 이후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자다 깨서도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외우고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입술도 떼기 어려웠을 것이다. 필사의 연습이 빛을 발했는지 발표는 자연스럽게 끝이 났고, 좌장의 질문도 예상 리스트에 있던 것이어서 무난히 답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 인생 가장 긴장했던 5분이 무사히 흘러갔다.

자리로 돌아와 흘린 땀을 닦으니 그제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 앉아 계신 교수님께서는 발표를 들으며 떠오르는 새로운 생각들을 태블릿 PC에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대가들은 학회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어 가는지 궁금해 대체 뭘 쓰고 계시는지 슬쩍 훔쳐 보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문장을 하나 발견했다.

‘이수영, 발표 잘함.’

그 때의 기쁨과 성취감 때문에, 대장항문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옆에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전공의에게 그 경험을 안겨 주고 싶다. 당신이 갇혀 있는 전남대병원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그 너머에는 어마어마하게 넓고 큰 세상이 있다고 가르쳐 주고 싶다. 앞으로의 인생을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

그래서 데리고 가는 거다. 절대 일꾼으로 부려 먹고자 데려가는 게 아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지친 삶에 휴식을 주며, 3년차 전공의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 줄 일석삼조의 학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시애틀 도착까지 다섯 시간 남았다.

이전 13화 넌 얼마나 절실하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