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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un 02. 2020

발사가 안 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오후였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 하나 없는 진료실 벽을 넘어 들어오고 있다는 착각이 들만큼 따스한 날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 병원에만 틀어박혀 있다니 안 될 노릇이다. 얼른 외래 진료를 끝내고 퇴근해서 꼬맹이들 데리고 산책이라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앞에 앉아 있던 환자가 뭔가 잘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한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내가 잘못 알아 들었나 싶어 재차 물어보니 환자는 심각한 얼굴로 여전히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발사가 안 된다고요.”

‘발사’라면 활이나 총, 로켓 따위를 쏘는 일을 말하는 것일 텐데 대장암 폐색으로 응급으로 수술을 하고 장루까지 만든 환자가 퇴원 후 방문한 첫 외래에서 꺼낸 말로는 맥락이 이어지지를 않는다. 일상에서는 잘 쓰이지 않지만 의사들은 흔히 쓰는 단어로 뽑을 발(拔)에 실 사(絲)자를 써서 실밥을 뽑는다(stitch out)는 의미로 발사(拔絲)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환자가 그런 의미로 썼을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이 환자는 이미 실밥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다. 나는 여전히 환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서기는 하는데, 발사가 안 된단 말입니다.”

눈치 하나로 버텨 온 지난 십 년이다. 이제서야 환자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되었다. 잘못 넘겨짚은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물었다.

“발기는 되는데 사정이 안 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니까요. 매번 그러더라는 말입니다”

‘발사가 안 된다’라니 참 문학적인 표현이다. 사정(射精)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이 역시 일상적으로 그리 자주 쓰이는 말은 아닌데다 직접적으로 이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민망하였을 것이리라. 그렇다고 ‘쌀 수가 없어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담당 의사에게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다시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62세의 남자 환자였다. 장폐색으로 개복수술을 했던 터라 하복부에 20센티미터에 달하는 수술 상처가 있었고, 좌하복부에는 장루 주머니까지 매달려 있었다. 게다가 수술 후 불과 삼 주밖에 지나지 않았다. 입원기간 내내 수술 상처가 아프다며 진통제 좀 놔 달라고 호소하던 환자였다. 그랬던 그가 너무나도 간절한 얼굴로 성관계 후 사정이 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3기 대장암으로 수술을 받았고 장루를 한동안 차고 살아야 한다는 것보다도 사정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인지도 몰랐다.


삼 주 전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남자는 95킬로그램에 달했고, 수술은 그리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직장구불결장 이행부위에 발생한 대장암이 남자의 장을 틀어막아 장이 있는 대로 늘어나다 보니, 그렇잖아도 내장지방으로 빈틈없는 뱃속을 헤치고 수술에 필요한 시야를 확보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대장암이 상당 부분 진행하여 전이된 림프절이 하장간막동맥 기시부 주변 대동맥을 둘러싸고 꽉 들어차 있었다. 하장간막동맥 기시부 주변으로는 방광과 생식기 등으로 가는 자율신경이 분포한다. 완전절제가 가능해 보이긴 했지만 이 림프절을 전부 박리하다가는 교감신경에 손상을 가져와 배뇨장애나 성기능장애를 유발하게 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 암의 완치를 노릴 것이냐 아니면 자율신경을 살릴 것이냐. 외과종양학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답은 이미 하나로 정해져 있었지만 짐짓 고민하는 척 순환간호사에게 물었다.

“이 환자 나이가 어떻게 되죠?”

“62세입니다.”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었다고 생각하며 림프절 박리를 시작했다. 소변 보는 기능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약을 쓰면 조금씩 나아지기는 할 테고, 역행성 사정(retrograde ejaculation)이야 뭐 혹시 생기더라도 환자 나이가 있으니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 어쨌든 중요한 것은 암을 근치적으로 절제하는 것이었다. 설사 젊은 남자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환자의 나이를 확인한 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을 뿐.

사정이 안 됨을 해결해 줄 것을 사정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나는 내 기억이 틀렸나 싶어 다시 모니터를 확인했다. 분명히 남자는 62세였다. 62세 남자는 성생활을 갖지 말라는 말인가. 아니다. 수술 직후에는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그것도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장루를 가지게 되면 성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인가. 그건 더더욱 아니다. 다만 성관계 도중 장루 백이 터져 주변이 분변으로 더러워지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해야 할 뿐이다. 그렇다면 세 시간에 이르는 개복수술로 대장암을 절제하고 장루를 가지게 된 62세 남자가 수술 후 2주만에 성관계를 가지는 것이 뭐가 이상하다는 말인가. 지극히 정상적이다. 단지 으레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쉽게 판단한 의료진의 선입견이 있을 뿐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전공의 1년차 시절 경험이 생각났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 환자가 전립선 침윤이 의심되는 직장암으로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다. 수술 동의서를 받기 위해 이런 저런 설명을 하는 것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남자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성기능장애가 올 수도 있다고요?”

“네, 직장 주변에는 성기능과 관련한 자율신경이 얽혀 있고 환자분의 경우에는 직장암의 주변 침윤이 심하여 수술 이후에 배뇨기능이나 성기능에 장애가 오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성이 얼마나 되죠?”

“……네?”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고요.”

“그건 구체적인 수치로 말씀드리기는 좀……”

처음 들어보는 질문에 당황한 내가 적당히 얼버무리자 남자가 선언했다.

“섹스를 못하게 된다면 저는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는 수술 받지 않겠습니다.”

P교수님의 불호령이 두려웠던 나는 괜찮을 거라고 일단 암은 제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암으로 죽어버리면 성관계고 뭐고 다 소용없지 않느냐고 환자를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하지만 도저히 환자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당장 내일 죽는 한이 있어도 섹스는 포기 못 하겠다고 하는데 어쩔 것인가. 결국 환자는 수술을 거부하고 퇴원해 버렸다. 그 환자는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67세였다.


심란한 얼굴로 앉아 있는 남자에게 역행성사정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후 비뇨기과 진료를 안내해 드렸다. 남자가 진료실을 나가고 다시 혼자가 된 진료실에서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인생은 60부터다. 60이면 아직 청춘이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그 누군가에게는 성기능이 떨어진다는 사실이 죽음보다도 더 크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동안 잊고 지냈다. 선입견에 사로잡힌 것을 보니 아직 수양이 많이 부족한가 보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군상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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