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쳇말로 역대급이었다. 손에 꼽을 만한 똥빼였다. 장 천공으로 인해 뱃속이 똥으로 가득한 빤빼(범발성 복막염, panperitonitis의 은어), 줄여서 똥빼. 덩어리진 대변은 석션(suction)이 되지도 않으니 손으로 퍼내는 거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똥 한 번, 한숨 한 번. 똥 한 번, 또 한숨 한 번. 어찌나 한숨을 쉬어 댔는지 한숨으로 수술방 전체에 가득 찬 똥냄새를 밀어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자궁암 재발 환자였다. 또 재발할 것이 무서워 2년째 아무런 치료도 검사도 하지 않았고, 일주일 전부터 배가 아팠는데 또 수술하자고 할까 봐 겁이 나서 끊어질 듯한 복통을 참다참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이제야 응급실로 왔단다. 생각하니 또 한숨이 나온다. 분명히 변 보기가 힘들었을 텐데. 평소에도 배가 아팠을 텐데. 미리 검사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일주일 전에만 왔어도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똥을 퍼내다 말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환자를 때리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으니 때릴 사람을 찾아 주변을 둘러 보았다. 마침 급한 병동 업무를 마치고 교대를 위해 스크럽 준비를 하던 2년차 N이 눈에 들어왔다. 옳거니.
“N 선생님…?”
“네?”
멸균 장갑과 가운을 준비하던 N이 깊게 쌍꺼풀진 두 눈을 크게 뜨고 무슨 일인지 묻는다.
“일단 저기 가서 무릎 꿇고 손 들고 30분만 있다가 들어오세요.”
“허허허.”
나는 인상 팍 쓰고 진심으로 말했는데 이건 뭐 교수 권위 같은 건 온데간데 없어서 N은 내 지시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스크럽을 위해 수술방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이 모든 사태가 다 누구 탓인지도 모르고. 이건 다 자네 탓이란 말이다. 자네가 원흉이란 말이다.
의사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는 소위 내공이라는 은어가 있다. 같이 트레이닝을 받더라도 꼭 누구는 어려운 환자를 도맡고 응급 수술에 죄다 참여하게 되는 반면 누구는 용케도 쉬운 환자만 맡으면서 응급 수술과는 담을 쌓고 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내공의 차이인 것이다. 내공을 쌓지 못한 자, 밀려드는 환자를 맞이하게 될 지니. 전공의 시절 내공 부족하기로 선두를 다투던 외과 동기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동기 누군가가 호를 만들어 주었는데, 위장이든 대장이든 충수든 쓸개든 뭐든 죄다 터진 환자들만 받는 모 동기의 호는 천공이요, 일단 왔다 하면 중증 패혈증으로 진행하는 내 호는 패혈이었다. 패혈 이수영 선생. 호까지 붙은 마당에 아니라고 해 봤자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그래, 나는 내공이 좋지 않은 전공의였다.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외과 전공의 시작 첫 주부터 삐걱거렸다. 할 줄 아는 것도 아무 것도 없이 2년차 형의 그늘 아래에서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한 주를 보내고 난 첫 주말. 토요일 아침 SGR이 진행중인 C강당에 앉아 전공의 시절 공부도 좀 열심히 해 봐야지 라는 기특한 마음은 오간데 없이 꾸벅꾸벅 졸던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누구야 매너 없게 잠을 깨우고 난리야 비몽사몽간에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이선생 전화 받아. 이런 내 전화였네. 웬만해서는 SGR 중에는 병동 콜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일까.
"선생님, 51병동인데요, OOO 환자 MI 떴어요."
"......네?"
잠도 덜 깬 상황에서 현실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선생님 담당 환자 MI라구요!"
나는 여전히 멍하고 간호사만 다급하다. 내가 알고 있는 MI는 myocardial infarction밖에 없는데...잠깐만. MI라고? 내가 알고 있는 그 급성 심근경색?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멀쩡하던 병동 환자가 갑자기 MI라니. 대체 왜? 계단을 세 개씩 뛰어올라 5층에 헉헉대며 다다르니 환자는 숨쉬기가 답답하다며 가슴을 부여잡고 있고 EKG가 마구 찍어져 나오고 있는데 교과서에 나오는 ST elevation과 T wave inversion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노련한 2년차 형님께서 이미 기본 혈액검사와 포터블 엑스레이 등등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순환기내과에까지 연락을 해 두신 상태라 내가 해야 하는 건 하나도 없었는데도 괜히 내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아무래도 아까 계단을 너무 열심히 뛰어 올라왔나 봐.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서 2년차 형님께 슬쩍 물어보았다.
"형, 병동 환자 가끔 MI 생기기도 하고 그러나요?"
"아니, 처음 봐. "
헉.
"지난 1년간은 아마 한 명도 없었을 걸?"
허걱.
"너는 주치의 맡은 지 일주일만에 왜 그러니? 벌써부터 이러면...걱정인데."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은 억울하기도 했다. 그게 왜 제 탓이에요. 굳이 따지자면 환자 탓이지. 저는 제 환자라는 거 말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는데.
이봐요 N 선생. 당신 탓이라고. 환자 자궁암이 재발한 것도, 일주일을 끙끙대며 참다가 온 것도, 우리가 지금 여기서 머리를 맞대고 똥을 퍼내고 있는 것도 결국은 다 당신 탓이야. 알아 들어?
의사들은 어디다 하소연 할 데도 없고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데 본인은 짜증이 나는 이런 상황이 오면 결국 누군가에게 투사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누군가는 대개는 그런 상황에서 항상 옆에 있는 환자 담당 주치의다. 자네는 내공은 다 어디다 팔아 먹고 이런 환자를 물어 왔는가? 어디서 환타를 얼마나 마셨길래 환자를 이렇게 타는 거냔 말이다. 오늘부터 환타 금지. 무조건 딸기우유만 먹는다. 알겠는가?
N 선생, 진심이 아닌 거 알지요?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인 거 알지요? 하지만 내 경험상, 처음에는 그냥 웃어 넘기다가도, 같은 얘기를 너무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이게 진짜 사실인가 내가 정말 패혈증 환자를 끌어 모으는 재주가 있나 싶어진답니다. 세뇌랄까요. 사람 참 우습지요.
하지만 내공이 달리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난 그걸 전문의시험 공부할 때 처음 느꼈어요. 동기들이 모여 스터디를 하는데 다른 친구들은 아무도 본 적 없는 병을 나는 당연스레 다 보고 수술도 들어가고 그랬더라고요. 나는 서울대병원에서 수련받으면 다들 그런 병은 한 번쯤 경험하고 지나가는 줄로만 알았어요. 나만 그런 거더라고요. 그게 쌓여서 다 실력이 되고 그런 겁니다.
N 선생님. 장담컨대 그대는 아주 실력 있고 유능한 외과의가 될 겁니다.
......위로입니다.
(2017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