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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Mar 17. 2020

아프지 말아요 우리

“아이고, 예쁘기도 하지. 참 예뻐.”

예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얼마만인가. 예쁘다는 형용사가 서른 일곱 먹은 사내에게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는 무사히 수술이 끝난 기쁨과 감사함을 담당 의사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예쁘다는 말로 수식하고 있었다. 네, 어르신. 수술 잘 끝났습니다. 아주 예쁘게 잘 되었어요. 심호흡하시고 내일부터 조심조심 걸어 다녀 보세요, 아시겠지요? 한참을 두 손을 맞잡고 함께 웃어드렸다. 

회진을 끝내고 연구실로 올라오니 잊고 있었던 복통이 다시 올라온다. 오늘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이온음료 한 통이 전부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아까 집어 삼킨 타이레놀 약효가 이제서야 올라오는지 머리는 어지러운데 어찌된 영문인지 복통은 그대로이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아, 그래도 오늘 수술은 일찍 끝나서 천만다행이다. 수술 하나가 취소되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더 힘들 뻔했다.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복통인데 이번엔 정도가 좀 심했다. 어제 피검사를 했더니 CRP(C-반응성단백질) 수치가 8이 넘는다. 세상에, 내 입원 환자들보다 내가 염증 수치가 더 높다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당최 누가 누굴 치료하겠다는 건지. 내가 당장 입원해야 할 판이다. 잠깐이라도 입원해서 금식하고 수액이라도 맞는 게 어떠냐는 내과 교수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약만 처방받았다. 며칠만 입원해도 훨씬 빨리 나아질 것도 같은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제 오후에만 외래 환자가 서른 명이 넘었고 오늘은 하루 종일 수술 스케줄이 잡혀 있는데, 그들은 누구에게 맡긴다는 말인가.

당장 내가 진료를 절대 할 수 없는 상황이면 모를까, 내 환자를 다른 교수님들께 부탁드리는 것은 죽기보다도 더 싫다. 나에게 찾아왔고 나를 믿고 나한테 몸을 내맡긴, 내 환자다. 그 믿음을 내 본위로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남다른 희생 정신을 가졌다거나 사명감이 투철하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과 개인의 신뢰에 관한 문제다. 나는 나에게 믿음을 보여준 환자에게 보답을 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의사는 마음 놓고 아프지도 못한다.


눈을 감고 누우니 몇 달 전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분주한 아침, 수술장 탈의실에 들어서다가 흠칫 놀랐다. A 교수님께서 교수 탈의실에서 환자복을 주섬주섬 벗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다리에는 경피배액용 주머니가 묶여 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여쭈었더니, 간농양이 생겨서 어제 경피배액관(percutaneous catheter drainage, PCD)을 넣으셨다고 한다. 간농양은 그렇게 간단히 치료되는 질환이 아니다. 간농양 환자는 입원시켜서 최소 일주일은 정맥 주사로 항생제를 쓰고 그 이후로도 한 달간은 경구 항생제를 써야 한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배액관을 넣은 지 하루 만에 수술 집도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계신 것이다. 푹 쉬어야 나으실 텐데요, 걱정스레 말씀드렸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다.

“수술이 줄줄이 밀려 있는데 그럴 수가 있나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교수님 건강이 먼저지.”

뻔한 얘기에 교수님께서는 대답 대신 그저 웃으시고는 수술장으로 서둘러 들어가 버리셨다. 이게 아닌데.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의사들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의료는 오래 유지되기 힘든데.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유지되는 저변에는 의사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이 넓게 깔려 있다는 사실을 환자들은 알까? 오늘 A 교수님께 수술을 받는 환자는 담당 교수님이 오늘 아침까지 입원중이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마음이 헛헛해졌다. 대학병원 교수들은 무엇 때문에 이러고 사는 것인지.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때 A 교수님께서 보여주신 행동을 내가 오늘 똑같이 했다. 의사의 헌신으로 유지되는 의료는 절대 안 된다고, 의사들의 건강이 먼저라고, 쉴 땐 쉬어가면서 일해야 한다고 혼자서 혀를 끌끌 찰 때는 언제고 막상 나도 같은 짓을 되풀이한 것이다. 남 얘기할 때는 아프면 쉬어야지 대체 왜 그러느냐고 쉽게 얘기하면서도 막상 내가 아프면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일을 손에서 놓지를 못한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타이레놀 두 알에 정신이 몽롱하니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래, 의사들은 다 똑같아.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지. 내 걸 누가 건드리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기적인 종자들이라고. <숨결이 바람 될 때> 쓴 폴 칼라니티 봐봐. 폐암 판정을 받고서도 끝끝내 수술장으로 돌아가잖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수술을 놓지 못하잖아. 그게 결코 환자를 위하는 숭고함 때문이 아니라고. 의사 자신을 위해서야. 환자가 아니라 나를 지키려는 몸부림이었다고. 영감님, 듣고 있어요? 내가 오늘 바득바득 수술을 한 건 영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어요. 조금 아프다고 드러누워 내 책임을 떠넘기는 건 내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고요. 영감님, 알아 들어요?

들어주는 이 없는 독백을 하노라니 졸음이 밀려온다. 에라 모르겠다 조금만 자자. 한숨 자고 나면 잡생각도 사라지고 컨디션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까무룩 잠에 빠져 들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그저 누워서 쉬고 싶은 할아버지와 어떻게든 운동을 시켜야겠다는 딸은 한 주 내내 병동에서 티격태격 중이다. 딸과 함께 병동을 걷고 있던 할아버지는 회진을 위해 저 멀리서 다가오는 실루엣만 보고도 나를 용케 알아보고는 양 손을 휘저으며 성치도 않은 다리로 반갑게 달려온다. 

“아이고, 고맙네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할아버지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맞잡은 두 손을 놓을 줄을 모른다. 

“고맙긴요 어르신. 이게 다 따님이 잘 간호해 드린 덕분이에요. 이제 곧 퇴원하실 수 있겠어요.”

“살려줘서 고마워. 복 받을 거야.”

이것이야말로 외과의사만이 누릴 수 있는 최선의 기쁨이자 행복이다. 내 환자들만큼은 쾌차해서 퇴원하는 것. 설령 구급차에 실려 들어오셨더라도 퇴원할 때는 걸어서 가실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좋아서 외과를 선택한 것이니까. 어르신, 수술도 예쁘게 잘 되었으니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부디 천수를 누리셔야 해요. 다른 사람도 아닌, 내 환자이시니까요.

이젠 정말 아프지 말아야겠다. 이 짓거리 평생 해 먹으려면 내가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내가 건강해야 내 환자들도 건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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