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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an 26. 2020

기적을 부르는 것은

기적은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집념 끝에 탄생한다. 기적적으로 살아나셨다는 말 자체가 신의 가호가 있었다든가 다른 사람에게는 오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든가 이런 의미로 들리지만, 틀렸다.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말은 살아남으려고 하는 환자의 노력과 의지가 기적을 불러왔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기적은 그럴 때 찾아온다.

의료계 속어 중에 ‘살아날 환자는 때깔부터 다르다’는 말이 있다. 실제 환자 때깔이 구별될 리는 만무하지만, 중환자에 대한 경험이 어느 정도 쌓이면 환자의 생사를 예측하는 어느 정도의 감이 생긴다는 의미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십여 년 외과 밥을 먹으면서 나도 비슷한 경험치가 축적되었는데, ‘좀 어려울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있는 힘껏 매달려 환자를 살려낸 경우는 몇 번 있었지만, 내 스스로가 ‘이 환자는 가망이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환자는 어김없이 세상을 떠나곤 했다. R이 바로 그런 환자였다. 모두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고, 내 스스로도 희망의 끈을 놓았던, 때깔이 좋지 않은 환자.


R이 응급실로 온 것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통 때문이었다. 응급실 도착 당시부터 패혈성 쇼크가 진행되어 이미 위독한 상태였다. 서둘러 개복을 했지만 결과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에스상결장의 천공으로 인해 분변으로 오염된 복강 내를 세척하고 장루를 만드는 수술을 하는 도중에도 환자의 상태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었다. 혈압이 유지가 되지 않아 승압제 용량을 증량했고, 산소분압을 최대로 유지하는 중에도 산소포화도가 자꾸 떨어졌다. 서둘러 수술을 끝내고 중환자실로 나왔지만 80대 할아버지의 체력으로는 이미 진행해 버린 패혈성 쇼크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였다. 수술 후 이틀간, 환자의 상태는 점차 나빠지기만 했다. 어느 장기 하나 온전한 것이 없었다. 벤틸레이터 세팅을 최대치로 유지해야 겨우겨우 산소포화도가 유지되었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승압제를 최대한의 용량으로 투여하고 있는 중에도 혈압이 잘 유지가 안 되었다. 급성 신부전에 빠져 지속적 신대체요법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혈압이 낮아 그마저도 어려웠고, 간수치 또한 1000까지 급격하게 상승하였다.

아, 이 환자는 어렵겠구나.

보호자들을 모두 불러 상황을 설명했다.

 ‘아버지 상태는 매우 위중합니다. 지금 당장 심장이 멎어버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저희가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보고는 있지만 회복하실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아요. 언제 갑자기 상태가 악화될 지 모르니 가능하면 보호자 중 한 분은 연락 받고 바로 오실 수 있는 거리에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보호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래도 최선을 다해 달라고 했다. 그러겠노라고 대답은 했지만, 나는 이미 최선을 다 하고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더 이상의 최선은 남아 있지 않았다. 더 할 수 있는 최선이 있다면 이미 했을 것이다.


다음 날, 나는 중환자실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수술 후 코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환자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라, 환자분 눈을 뜨셨네요. 언제부터 깨어나신 거죠?”

“한 두어 시간 정도 지났어요. 바이탈은 여전히 불안정한데 멘탈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네요.”

환자의 전반적인 상태는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대사성 산증이 어제보다 악화되었고, 범발성혈관내응고장애가 발생하면서 복강 내에서 출혈이 지속되어 드레인은 물론 복부 절개창을 통해서도 피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회복 가능성을 시사하는 소견이 없었다. 겨우겨우 심폐기능만 유지시켜 주고 있는 상황에서, 환자가 눈을 뜬 것이다.

“정신이 좀 들어요? 여기 어딘지 아시겠어요?”

기도삽관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대답할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환자에게 말을 걸었다. R은 눈을 끔뻑이며 나를 쳐다 보았다. 이상하리만치 살아 있는 눈이었다. 나는 살고 싶다고, 살아야겠다고 간절하게 말하는 것만 같은 눈이었다.

‘미안해요. 살려드리고 싶은데, 제 능력은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저는 신이 아니에요.’

의지만으로 살아날 수는 없었다. 현재 상황을 극복하고 살아나려면 기적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과학을 배운 사람이지, 기적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환자가 일시적으로 눈을 떴다고 한들, 회복할 가능성이 0에 가까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산소포화도는 낮았고, 빈맥을 알리는 알람이 쉬지 않고 울어댔다. 역시나 어려웠다. 얕은 한숨을 쉬고 중환자실을 나왔다.


그리고, 기적은 일어났다.


R은 버티고, 또 버텼다. 중환자실에 회진을 갈 때마다 R은 예의 그 눈빛을 나에게 쏘아 댔다. 나는 살아날 것이다. 두고 보아라. 내가 이기나 니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 보자. 내 마음은 이미 사망 선고를 내렸는데도, 보호자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도, R 자신만은 포기를 모르는 것 같았다. 객관적인 증거들이 모두 가망 없음을 말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일말의 가능성을 자꾸만 생각하게 만드는 눈이었다.

그렇게 R은 하루를 넘기고 이틀을 살아 내더니,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을 버텨 냈다.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일반 병실로 나왔고, 두 달여 간의 투병 끝에 끝내 퇴원했고, 또 한 달이 지나 보란 듯이 걸어서 외래로 왔다.

“아이고, 선생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외래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R이 반갑게 말했다. 목소리가 어딘가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내가 알던 R이 정말 맞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입원해 있는 석 달 동안 R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석 달 동안 말도 제대로 못하던 환자가 걸어서 외래로 온 것이다. R을 모시고 온 큰 딸이 말했다.

“선생님 덕분에 저희가 효자 효녀 소리를 듣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다. 내 덕분이 아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저승의 문턱에서 스스로를 돌려세운 건 바로 R 자신이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저 말고 아버님께 고마워하세요.”

“네?”

“아버님을 살린 건 제가 아니라, 아버님 자신이라고요.”

그렇게 R은 기적과도 같이 생환했다.


그래, 기적은 그렇게 스스로의 의지를 타고 우리 곁으로 찾아 온다. R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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