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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May 13. 2021

눈물의 이유

나는 어려서부터 눈물이 많았다. 슬퍼서 울었고, 억울해서 울었고, 기뻐서 울었다. 남들 앞에서는 어떻게든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이를 앙다물고 참으려 노력했지만 벌게진 눈과 끅끅거리는 소리까지 숨길 도리는 없었다. 여섯 살 때는 TV로 <엄마 없는 하늘 아래>를 보다가 목놓아 울어 부엌일을 하시던 어머니를 놀라게 했고, 고등학교 때는 영화관에서 <파이란>을 보다가 숨죽여 우는 모습을 친구에게 들키기도 했으며,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 선수가 역전골을 넣었을 때는 그야말로 대성통곡했었다. 어른이 되고 나니 다른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일은 거의 없어졌지만, 뒤돌아 혼자 눈물짓는 습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것은 좋게 해석하면 '공감 능력'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감정 과잉'이다. 환자를 직접 상대해야 하는 임상 의사, 그 중에서도 특히나 냉정을 유지해야 하는 외과 의사의 입장에서는 감정의 과잉이 진료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환자의 감정에 과도하게 이입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물론 그게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니어서 환자나 보호자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닌데 그럴 때마다 입술을 깨물고 참아내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말기 암환자를 상대해야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C의 뱃속은 말 그대로 돌덩어리였다. 충수돌기암으로 수술 받을 당시부터 퍼져 있던 복막전이는 거듭된 항암치료에도 나아질 기미가 없이 진행하기만 했고 마침내는 C의 장(腸)을 전부 잠식해 버렸다. 어느 한 군데 정상적인 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쓸만한 장을 확보해야 장루라도 만들 수 있을 텐데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복강 전체에 퍼져 버린 복막전이는 뱃속 모든 장을 틀어쥐고 놓아주지를 않고 있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복막전이암과 함께 한덩어리로 붙어버린 장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에게 제1조수로 들어와 있던 치프 전공의가 물었다. 

"더 진행하실 건가요?"

안다.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음을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래서 화가 난다. 50대 창창한 나이에 암으로 생을 마감하게 될 C의 운명에 화가 나고, 그 운명을 되돌리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능력에 더 화가 난다. 장루라도 만들어 줄 수 있었으면 조금은 마음이 편했을 것을. 배를 열었지만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하고 닫아야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만 닫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건 이제 그만 포기하자는 선언과도 같았다. 말이 되어 나오는 순간 사람을 살리는 의사라는 내 자존감이 바닥으로 추락해 버릴 것만 같았다.

"젠장."

사람을 살리는 의사라는 자부심 따위, 허세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제, 이 소식을 보호자에게 전해야 할 차례였다.

상담실에서 C의 아내와 마주했다. 아내는 이제 수술을 받았으니 괜찮아질 거라는 기대를 한가득 품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냉정해져야 했다. 내가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더 이상은 손쓸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 항암치료고 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C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무 것도 모르고 기다리고 있는 C의 아내에게 알려야만 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나의 분노와 절망을 그대로 담아 전달할 수는 없었다. 뜨거웠던 심장이 급속도로 차갑게 식고 있었다. 나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배를 열었는데 암이 진행을 너무 많이 했어요.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을 만큼 복막 전이가 넓게 퍼져서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하고 닫았습니다."

놀란 C의 아내는 눈물을 흘릴 정신조차도 없어 보였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더 이상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남편 분은 이제 식사를 못 하실 것이고, 그러면 항암치료든 뭐든 아무 것도 못 합니다."

조금씩 현실감을 찾기 시작한 C의 아내가 울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 싸늘해졌다.

"이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환자분과 상의하셔서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여전히 울고 있는 C의 아내를 뒤로한 채 상담실을 나섰다. 심장이 다시 따뜻해지면서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대중들은 말기암 환자에게만 주목할 뿐 환자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리기 위해 애쓰는 의사들의 속사정은 모른다. 한 사람의 생명이 스러질 때 담당 의사가 얼마나 고뇌하고 좌절하며 절망하는지 의사가 아닌 일반인은 절대 알 수가 없다. 배를 열었음에도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배를 닫아야 하는 외과의사의 심정을 그 상황에 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눈곱만큼도 헤아릴 수 없다. 그 절망마저 따뜻하게 전달해 달라고 하는 건 무리한 요구다.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 밖의 일이다. 환자와 보호자를 위로하기 위해 거짓을 말할 수는 없고, 사실을 말하면서도 희망을 주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이 말기암 환자를 대하는 의사들이 전달해야 하는 사실만을 건조하게 말하는 이유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자책과 절망이 아물어갈 때쯤 나는 또다시 말기암 환자를 수술하게 될 것이고, 언제나처럼 냉정함의 탈을 쓰고 그들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뒤돌아 몰래 흘리는 눈물은 습관처럼 계속될 것 같다. 


부디, 모든 말기암 환자들에게 평안한 휴식이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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