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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an 10. 2020

죽음을 대하는 외과의의 자세

0.

“삑”

아이디카드를 가져다 대자 굳게 닫혀 있던 응급실 출입구가 열린다. 시쳇말로 ‘헬게이트’를 또 한 번 열고야 말았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지고 있는 바깥 세상의 평화로움과는 단절된, 생과 사의 경계의 공간. 습관처럼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응급실에 들어선다. 환자의 생과 사를 결정하게 될 발걸음은 항상 무겁기만 하다.


1.

폐암 말기로 복강 내까지 전이가 되어 손쓸 방도가 없어 보존적 치료만 하던 여든 줄의 할아버지가 복통으로 응급실로 왔다. 전이 병변이 문제가 되어 소장에 천공이 생긴 모양이었다. 복막염의 정도가 심해 패혈성 쇼크로 진행하고 있었다. 응급실에 도착하여 측정한 수축기 혈압이 80mmHg이 채 되지 않았고, 수액을 들이 붓고도 혈압이 유지가 안 되어 승압제까지 시작한 상태였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수술의 위험성, 수술 후 패혈증으로 사망할 가능성 등을 생각조차 할 것 없이 한시라도 바삐 수술장으로 환자를 끌고 들어가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환자는 85세의 말기 폐암환자였다.

수술을 하는 것이 과연 환자를 위한 길일까? 환자가 그나마 온전한 정신으로 보호자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뿐이다.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하고, 중환자실로 옮겨, 온갖 장치들에 기대어 삶을 연명하다가, 결국엔 깨어나지 못하고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것이 뻔한 상황. 수술로 좋아질 확률이 극히 낮은 상황에서, 사랑한다고 고마웠다고 그 한 마디 말조차 하지 못하도록 전신마취를 해 버리는 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했다. 보호자와 상의 하에 수술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수술해도 돌아가시고 안 해도 돌아가신다면 그냥 조용히 임종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마음이 아프지만, 이게 최선일 겁니다. 보호자들을 위로하고 퇴근했다.

패혈성 쇼크로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 속에서도, 환자는 끝끝내 수술을 받고 싶어했다. 삶의 의지가 대단한 할아버지였다. 제발 살려달라고 수술 받게 해 달라고 밤새 끙끙대는 아버지를 그냥 두고 볼 수 있는 아들이 어디 있으랴.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아들이 다시 수술을 받기를 원한다고 연락이 왔다. 허 참, 이럴 거였으면 어젯밤 수술하는 편이 그나마 기적적으로 회복될 확률을 조금이나마 높일 수 있었겠는데 말입니다. 좋아지실 가능성은 정말 희박합니다. 그래도 정말 수술 받으시겠습니까?

환자의 완강함을 꺾지 못하고 끝내 수술이 결정되었다. 숨을 헐떡이며 수술대에 누워 있는 환자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할아버지, 아들 딸들과 무슨 말 나누고 들어오셨어요?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자제 분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잘 하고 오시라고 하던가요? 아들 딸 얼굴은 잘 새기고 들어오셨어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취약이 들어가고, 환자는 조용히 잠에 빠져 들었다. 이제 더 이상은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음을 환자는 알고 있을까?

수술이 끝나고 환자는 중환자실로 입실했다. 걱정과는 다르게, 상태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환자의 투철한 삶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된 듯했다. 내 판단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내가 건방지게도 할아버지의 삶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여 중단시키려 했던 것일까? 내 판단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랐다. 할아버지가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뜨고 내가 살아 돌아 왔노라고 회생 가능성이라는 확률 따위 개나 줘 버리라고 떵떵거리며 나를 꾸짖어 주시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기적이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못난 외과의에게 알려 주시기를 소원했다.

수술 후 5일째, 갑자기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한계에 다다른 것일까. 대사성산증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혈중 크레아티닌이 오르면서 소변이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간수치는 3000까지 상승했다. 패혈증에 이은 전형적인 다장기부전이었다. 희망을 가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보호자들을 불러 상태를 설명하고 임종을 준비하시라고 일렀다.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한 보호자들은 담담했다. 

그리도 굳건했던 삶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결국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2.

70세의 남자 환자였다. 하행결장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항암치료도 중단하고 지내다가 결장암 천공이 발생하여 응급수술을 시행했다. 패혈증이 진행하는 속에서도 폐기능이 유달리 좋아 씩씩하게 자발호흡을 이어갔고 열흘 만에 호전되어 중환자실을 나와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었다. 사경을 헤매던 환자가 정신을 차리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 내가 왜 여기 있느냐를 물어왔을 때는 아 이제 되었다 당장 돌아가시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환자의 아내도 분명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도, 일반병실로 옮긴지 이틀 만에 비정형성 폐렴이 발생하였고, 환자 상태는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기도 삽관은 하지 않겠습니다.”

환자의 아내가 돌연 선언했다. 아내로서의 직감이 지금 삽관을 하면 더이상 되돌릴 수 없음을 예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환자의 의식은 이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혼미해져 있었지만, 삽관을 하고 나면 일체의 대화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지난 2주의 경험을 통해 보호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보내기는 싫다고 했다. 어떻게든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안다. 나도 그러기를 원한다. 하지만 지금 삽관을 안하면 되돌릴 수 있는 환자의 손을 놓아버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얼마나 더 사시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당장 돌아가시지는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시지 말아달라. 보호자를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설득은 성공했다.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겨 기도 삽관을 했다. 반드시 살리고 싶었다. 수술은 잘 되었는데 폐렴으로 환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분명 살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마지막 한 마디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반드시 확보해 드리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 후 이틀. 기대와는 다르게 환자의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지기만 했다. 할 수 있는 모든 의학적 조치를 쏟아 부었음에도 일말의 호전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의사는 신이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거야. 내 탓이 아니야……정말? 정말 내 탓이 아니니? 매순간 환자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정말 확신할 수 있는 거니?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거니? 정말?

의료진의 절망과 보호자의 체념을 가득 업고, 환자는 기도 삽관 후 이틀 만에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러길래 내가 기도 삽관이고 뭐고 안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마지막 한 마디 못하고 떠나 보내는 게 말이나 되느냐.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보호자들의 애처로운 눈길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 눈길을 감당할 수 없어 사망선고를 비롯한 제반 처리를 담당 전공의에게 떠넘기고 도망치듯 중환자실을 빠져나왔다.


3.

임종의 순간은 전혀 극적이거나 혹은 낭만적이지 않다. 여보 사랑해 먼저 가서 미안해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해 하고 두 손 맞잡고 눈물을 흘리다가 꼴까닥 숨이 넘어가면 심전도가 갑자기 심정지 상태로 변하고 의사는 저 먼발치에서 고개만 떨구는 그런 죽음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이다. 대다수의 환자들은 가족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전할 새도 없이 본인이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음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갑작스레 상태가 나빠진다. 의료진은 어떻게든 환자를 살려보려 삽관을 하고 승압제를 달고 투석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하지만 최선의 노력이 항상 최상의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아서 그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결국 죽게 된다. 임종 직전의 환자는 혹시 모르는 소생의 가능성을 붙들고 시행하는 온갖 의학적 처치 속에서 정작 보호자와는 철저히 분리되며, 중환자실에서 현대 의학이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한 끝에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이 되면 그제서야 보호자가 환자 곁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지금껏 적지 않은 환자의 임종을 지켜봤지만 임종 직전 작별인사를 하고 눈을 감는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병원에서 맞이하는 외과 환자의 죽음이란, 으레 그렇다.

무엇이 옳은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마지막 한 마디 나누시고 조용히 눈감으시라 했던 환자는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꺾지 못하고 수술을 감행했지만 중환자실에서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조용히 보내 드리겠다던 보호자를 설득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 살려 보겠다고 애썼던 환자는 의료진을 향한 보호자의 원망만 안은 채 숨을 거두었다. 기적을 믿고 무의미할지도 모르는 치료를 지속하는 것과 더 이상 환자를 힘들게 하지 않고 조용히 보내 드리는 것, 어느 쪽이 바람직할까. 의사는 어떤 상황에서든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배운다. 의사는 어디까지나 의사일 뿐, 신이 아니다. 환자의 삶을 의사의 판단으로 중단시킨다는 건 자신의 판단 능력에 대한 과신과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이상 환자를 힘들게 하기 싫다며 모든 침습적인 치료를 거부하는 보호자들이 결코 적지 않다.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려면 의사로서의 책임과 양심은 물론 실정법이 허용하는 테두리까지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어야 한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최상의 선택은 아니다. 현실의 의료는 그렇다.

바이탈을 다루는 의사로서 환자의 죽음을 겪지 않을 도리는 없다. 내 환자들만큼은 모두 쾌차해서 퇴원하기를 바라지만 부질없는 바람이다.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고자 스스로에게 버릇처럼 주문을 건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거야. 비겁한 자기위안이고 변명임을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또 다음 환자를 맞이할 수 있으니까.

가망 없다는 판단을 뒤엎고 침대를 박차고 일어서는 환자가 언젠가 꼭 나타나기를. 이건 정말 기적이라며 보호자들과 얼싸안고 춤이라도 출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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