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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an 19. 2020

진실과 일상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 스미노 요루

0.

“너는 분명 나한테 진실과 일상을 부여해 줄 단 한 사람일 거야. 의사 선생님은 내게 진실밖에는 주지 않아. 가족은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과잉반응하면서 일상을 보상해주는 데 필사적이지. 아마 친구들도 사실을 알고 나면 그렇게 될 거야. 너만은 진실을 알면서도 나와 일상을 함께해 주니까 나는 너하고 지내는 게 재미있어.”

- 스미노 요루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中 –


나는 진실을 주어야 하는 의사다.

굳게 닫힌 상담실 문 너머에는 보호자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진실을 기다리고 있다. 수술은 잘 되었나요?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오래 사실 수 있을까요? 위독하신 건 아닌 거죠? 항암이 필요할까요? 보호자들은 각자 이런저런 질문을 준비하고 환자의 상태에 대해 진실된 설명을 요구하지만, 진실이라고 해서 다 같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보호자들이 바라는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이다. 만약 후자라면 진실을 전달하는 쪽의 마음은 좀 더 복잡해진다.


1.

“수술, 잘 되었죠?”

분명 이렇게 묻고 싶을 테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두 손만 모아 쥐고 있는 아내의 눈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대장암, 3기, 수술, 항암, 재발, 다시 항암, 구토, 장폐색, 그리고 응급수술. 수술 후 보조(adjuvant) 항암화학치료가 끝날 무렵 시행한 컴퓨터 단층촬영(CT)에서 바로 재발이 발견되었고 2차(second-line) 항암치료는 채 몇 사이클 진행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재발한 암이 자라나 장을 막아버렸으니, 수술을 해보지 않아도 좋지 않은 예후는 이미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의료진의 객관적인 예후 판단과는 별개로, 아내는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을 손에 쥔 내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수술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아요.”

내 첫 마디에 이미 아내는 심리적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나도 같이 무너져버릴 것만 같지만 나는 진실을 전달해야 하는 입장이니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재발한 암이 췌장까지 침범하여 수술적 절제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요. 재발한 암은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식사가 가능하도록 장루만 만들었어요. 당분간은 식사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재발한 암을 제거하지 못했으니 항암을 추가로 하더라도 좋은 예후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진실이 담당 의사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장탄식과 함께 아내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아내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한 마디 덧붙였다.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아내의 눈물 앞에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찰나의 시간 동안 망설였지만, 사실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마지막 남은 진실을 전했다.

“글쎄요, 사람마다 다릅니다만…… 6개월 안쪽이라고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빠르면 한두 달일지도.”

잠시 진정된 듯했던 아내의 눈물샘이 다시 터져버렸다.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아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때로는 침묵이 백 마디의 말보다 더 나은 법이다.

수술 후 일주일만에 퇴원했던 환자가 한 달 뒤 밝은 얼굴로 외래로 찾아왔다. 근 반년 만에 처음으로 입맛이 좋다고 했다. 밥만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배가 아파 식사를 잘 못했었는데, 수술하고 나서 식사량이 늘고 살이 붙었단다.

“그래요. 식사 잘 해서 체력 유지하시는 게 지금으로서는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치료를 또 견디시죠.”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다 얘기해 줄 수 없었다. 환자의 눈에 담긴 희망에 도저히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었다. 2차 항암치료까지 실패한 지금 당신의 여명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쓸만한 약제도 별로 없어요. 컨디션 괜찮으실 때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생을 정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당사자를 앞에 두고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모질지는 못했다. 뒤에서 울 듯 말 듯 입술을 깨물며 서 있는 환자의 아내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달 뒤, 환자는 세상을 떠났다.


2.

완화수술(palliative surgery)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증상만 완화시켜 주는 수술이다. 장(腸, intestine)을 전문으로 다루는 외과 의사의 특성상, 완치가 어려운 암환자들을 대상으로 식사라도 하게 해 주려는 목적으로 이런 수술을 종종 하게 된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절제가 불가능한 간전이를 동반한 68세 대장암 환자가 응급실로 내원했다. 간 전체를 침범한 전이병변은 3차(third-line)까지 이어진 항암치료에도 전혀 반응이 없이 계속 퍼지기만 했고, 그러던 중 원발암이 대장을 막아 장폐색이 찾아온 것이었다. 완치는 어렵더라도 장폐색을 해결하려면 완화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수술장 스케줄이 비는 틈을 타서 얼른 해치워야 하는데 환자 보호자가 수술을 망설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 년여의 기간 동안 이어진 항암치료에 지쳐 있음이 분명했다. 아니 그럼 남은 생을 복통을 안은 채 굶으면서 병원에서만 보낼 생각인가? 절대 안 될 일이다. 담당 전공의에게 수술의 필요성을 상세히 설명하고 설득하도록 지시하였고, 다행히 응급수술을 하기로 동의를 얻어 완화 목적의 우반결장절제술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환자의 아내와 두 딸이 상담실에 무거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덩달아 내 마음도 한층 더 무거워졌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이미 설명을 어느 정도는 들으셨겠지만, 오늘 수술의 목적은 암의 치료가 아니에요. 환자분 식사를 하시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종양내과 교수님께서 충분히 설명해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항암 약제를 바꾸어가며 1년을 했는데도 암이 계속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니 기대되는 예후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앞으로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 알 수 없어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인데 환자분을 금식하며 콧줄을 유지한 채 병원에서만 지내다가 가시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꼭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던 거예요. 수술이 큰 문제 없이 잘 마무리되었으니 한 일주일 지나면 회복이 되실 것이고, 당분간은 식사하고 대변보시는 데는 지장이 없으실 거예요. 그러면 집으로 퇴원하세요. 얼마나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짧은 기간이나마 집에서 정리를 하셔야지요.”

조용히 듣고 있던 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선고받는 딸의 심정이 어떠할 것인가. 자리를 얼른 뜨고 싶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진실을 냉정히 전해야만 하는 의사의 입장에서, 의료진이 해 줄 수 있는 건 이게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전달하는 자리는 항상 어렵기만 하다.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의사의 한계를 드러내야만 하는 건, 죄송하고, 부끄럽다. 감사하다는 딸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상담실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3.

진실을 주는 것으로 나의 역할은 끝이다. 나머지는 환자와 주변인들의 몫이다.

스미노 요루의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주인공은 이전과 다르지 않은 일상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일상을 보상해 주려 필사적인 가족들보다 진실을 알면서도 일상을 함께해 주는 친구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암 환자들에게 내가 기어코 수술을 권하는 것도, 그들의 귀중한 남은 삶에 짧게나마 일상을 마련해 주고픈 이유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외과 의사로서 해 줄 수 있는 마지막이다.

내가 내 입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해 버린 그들의 남은 일상은 어떠했을까? 나는 과연 그들에게 소중한 일상을 선물해 준 것일까? 비록 한두 달에 불과한 짧은 기간일지라도 어떻게든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고픈 내 의지가 전달이 되었을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을 전해 듣고도 과하게 호들갑 떨지 않고 그저 일상을 함께해 준 가족과 친구들이 그들 곁에도 있었을까?

내 환자는 모두 완쾌되어 퇴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외과를 선택했는데, 종양학을 전공하다 보니 죽음을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곧 다가올 죽음에 대한 진실을 전하는 건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고 매번 새삼스레 어렵다.

부디 모두들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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