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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Mar 27. 2020

라플라스의 악마

이처럼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이제 미래는 여러 갈래로 매 순간 분기하는 가능성의 갈림길이 아니다. 과거로부터 이어지던 길이 하나인 것처럼, 미래는 또 마찬가지로 오로지 하나의 길로만 존재하게 된다. (중략) 내가 매 순간 미래를 향해 분기하는 가능성의 여러 갈림길을 볼 때, 나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라플라스의 악마는 그중 딱 하나의 이미 결정된 길만을 본다는 뜻이다. 선택의 자유를 믿으며 미래의 가능성을 내가 꿈꿀 때, 라플라스의 악마는 하나의 길로 정해진 미래를 보지 못하는 내 초라한 지적 능력을 가련히 여길 거다.

- 김범준 <관계의 과학> 中


의학은 선택의 연속이다. 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다면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고민하는 부담이 덜해지겠지. 의학이란 1 더하기 1이 2가 아닐 가능성을 항상 생각해야 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난 분명 의학이 아니라 수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했을 것이다. 나는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옳은 선택을 하도록 늘 강요 받고, 그 결과는 온전히 나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지난 넉 달을 입원해 있던 할머니가 있었다. 대장암 천공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응급으로 수술을 했고, 다행히 회복되어 집에서 지내던 중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수술 부위에 암이 재발하여 장을 다시 막아 버렸다. 응급수술을 했지만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 재수술에 재수술을 거듭했고, 이제는 회복의 가능성 없이 그저 목숨만 이어 가고 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넣어 두고 잊고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환자가 병동에 입원해 있는 한 의사는 ‘살아 있는 실패의 증거’를 매일 마주해야 한다. 보호자들은 회진 때마다 고맙다며 인사를 하지만 실은 속으로 얼마나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항상 결과가 좋을 수만은 없다는 자기위안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짐이 환자를 만나는 하루하루 커져만 간다.

복기를 해 본다. 처음부터 수술을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첫 수술 때 우회로를 만들 것이 아니라 소장으로 장루를 만들어야 했을까? 두 번째 재수술은 아무래도 무리였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해 보아도 내 판단이 잘못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고, 할머니는 미음 한 모금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선택의 순간에 다른 판단을 했다면 어땠을까? 할머니는 지금쯤이면 벌써 퇴원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은 이렇게 되도록 이미 정해져 있던 미래였을까? 나에게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었던 것일까? 나는 단지 정해진 미래를 알지 못했던 것뿐이었을까? 악마에게, 라플라스의 악마에게 이 모든 짐을 떠넘겨 버리면 되는 것일까?


할머니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의 영혼은 이미 이승을 떠나버린 듯 보호자들의 부름에도 반응이 없이 숨만 힘겹게 헐떡이고 있었다. 지난 넉 달을 번갈아 병상을 지키던 아들과 딸이 그 힘겨운 숨을 지켜보기 버거워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지금이라도 편히 떠나실 수 있게 조치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아니다. 안 될 말이다. 나는 삶을 이어가게 하는 법을 배웠을 뿐, 삶을 거두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다. 이미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병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보호자들도 알고 있었다. 조용히 고개를 젓고 병실을 나왔다.

할머니는 다음 날 아침 세상을 떠났다.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주어지면 미래가 하나로 결정되어 있다”라는 19세기 물리학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양자역학은 위치와 속도를 함께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을, 카오스는 위치와 속도를 아무리 정확히 측정해 알아내도 결국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줬다.

- 김범준 <관계의 과학> 中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 하나가 폭풍을 몰고 올 수 있듯, 나의 작은 선택 하나가 환자의 삶과 죽음을 가르게 될 지도 모른다. 환자의 인생이 걸린 그 판단의 무게는 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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