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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Sep 11. 2020

사람을 살린다는 자존심

"이 연세에 수술해도 괜찮으실까요?"

어머니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백발이 성성한 아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대장암 폐색으로 한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못했다는 할머니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할머니는 이미 일년 전에 대장암 진단을 받고 스텐트 확장술을 받은 상태였다. 그 때는 왜 수술받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이 연세에 무슨 수술이냐며 주변 사람들이 전부 말려서 안 하는게 낫겠다 싶었단다. 그전까지는 마을 산책도 다니고 정정하셨는데 스텐트 시술 이후 식사량이 줄고 부쩍 기력이 쇠하셨다고 했다. 그러다가 종양이 다시 자라 스텐트를 거의 대부분 막은 상태에서 복부 팽만이 심해져 참다 못해 내 외래로 온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 괜찮다. 당연히 안 괜찮다. 괜찮을 수가 없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를 전신마취해서 두 시간동안 수술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쇠할 것이 뻔한데, 이미 소진할대로 소진해 버린 체력을 가지고 응급수술을 받으시게 될 터이니 수술 이후 얼마나 회복하실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 사람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의학적이지 않은 조언을 아끼지 않는 '주변 사람들'이 매번 말썽이다. 그나마 체력이 남아 있었던 일년 전에 수술을 하셨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것을 일년을 묵혀서 병을 키워서 왔다. 작년에 수술하자고 할 때는 안 하고 왜 이제서야 오셨느냐고, 수술할 수 없다고,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면, 그냥 이대로 돌아가시라고 내버려 둬요?"

그것은 수술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일년을 버텨온 보호자를 향한 일종의 힐난같은 것이었다. 겨우 이 정도의 퉁명스러움이 내가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의 최대치였다. 멋쩍어하며 입을 다물고 있는 아들과 달리, 입을 연 것은 할머니 본인이었다.

"수술 안 받고는 안 되는 것이여?"

연세에 어울리지 않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진료실을 울렸다.

"네 할머니. 수술 받으셔야겠어요. 뭐라도 잡수시려면 다른 방법이 없어요."

"정 그러면 수술 해야제."

아흔이 넘은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단호한 목소리였다.

"똥주머니 차야 해요. 그건 알고 계셔야 해요."

"어쩔 수 없지 뭐. 잘만 해 주시요."

그렇게, 일년여 만에 할머니의 응급수술이 결정되었다.




어제 모 대학병원의 소화기내과 교수님이 법정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뇌경색으로 거동이 어려운 여든이 넘은 환자의 CT에서 대장암으로 인한 장폐색 의심 소견이 보여 내시경을 하기 위해 환자에게 장정결제를 복용시켰다가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환자가 사망한 사건이었다.

기사로만 접하였고 사건의 세부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의사의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환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접한 담당 교수님이 여러가지 임상 소견을 바탕으로 종합적으로 내린 판단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내 임의로 평가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해당 사건의 담당 교수님은 어디까지나 환자를 살리려고 했다는 점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다. 뇌경색으로 침대에 누워만 있는 82세 노인에게 대장내시경을 시행하는 것은 준비 과정에서부터 이미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담당 교수님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정결제를 먹여 대장내시경을 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어떻게든 대장암 진단을 내려 치료를 받으실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선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하다. 높은 위험성에도 대장내시경을 굳이 시행하려고 했던 건, 한 사람의 목숨을 살려내고야 말겠다는 의사로서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교수님은 예측되는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금고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생판 모르는 남의 목숨을 살려내고자 똥으로 가득 찬 뱃속을 헤집으며 사투를 벌여본 적 있는가?

제발 살려 달라고, 우리의 노력을 헛되게 하지 말아 달라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빌어 가며 밤새 뜬눈으로 중환자실을 지켜본 적 있는가?


남들이 모두 기피하는 외과 의사로 살면서도, 사람을 살리는 의사라는 자존심 하나로 버텨 온 지난 세월이다. 그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는 순간 외과 의사로서의 내 삶은 끝이다.


그 때 그 아흔 살 할머니와 다시 마주한다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응급수술을 하고 환자가 잘못되면 소송을 당하고 형사처벌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면서도 여전히 할머니를 살려야 한다는 내 자존심을 고집할 수 있을까?

위험을 무릅쓰고 수술을 하느니 조용히 돌려 보내는 것이 옳은 결정일까?

예견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살릴 수 있는 사람의 손을 놓는다면, 나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맞는 것일까?


사람을 살린다는 자존심을 지키기에는 바이탈을 다루는 의사를 향한 세상의 잣대가 너무 가혹하다.

슬프고,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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