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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Nov 11. 2023

로마의 기원 (2/2)

새롭게 터를 잡은 이웃 팔라티노 언덕 사람들의 초대에 퀴리날레 언덕의 사비니 족 사람들은 흔쾌히 응합니다. 모처럼 배불리 먹을 기대감에 잔뜩 들뜬 기분으로 말입니다. 아무런 부담 없이 모여든 사비니 사람들은 엄청나게 차려진 음식과 술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이게 웬 횡재냐 하며 남녀 모두 정신없이 부어라 마셔라 먹어댔습니다.         

      

연회장 한편 단상에서 이를 지켜보던 로물루스가 갑자기 왼팔을 힘차게 치켜듭니다. 그 순간 주변에 숨어 있던 로마 남자들이 뛰쳐나오며 사비니 여인들을 하나씩 낚아채고 도망칩니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합니다. 사비니족 남자들은 자기 아내와 딸과 여동생들이 로마 남자들에게 잡혀가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지만 어쩔 방도가 없었습니다. 이미 다들 대취해 있었고 주변에 로마 군인들이 살벌하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광경을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이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사비니 여인들 납치’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 중입니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가면 같은 주제의 조각상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조각가 잠볼로냐의 작품인데 진본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고, 여기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건 모조품입니다. 로마 남자에게 붙들려가는 여인의 모습이 처절하고, 그 아래 여인의 남편 또는 시아버지 같은 남자의 자세도 절망적입니다. 같은 주제의 그림을 거장 루벤스도 그렸습니다. 가로 폭이 2.4미터인 이 대형 그림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습니다. 앞에서 본 니콜라 푸생의 작품보다 붓터치가 거칠어 보이면서 더 아수라의 모습입니다. 오른쪽 연단 의자에 앉아서 로마 남자들을 지휘하는 이가 로물루스입니다.        

       

암튼 이날 사비니 남자들은 졸지에 자신들의 아내와 딸과 여동생들을 로마 남자들에게 빼앗깁니다. 그리곤 속절없이 퀴리날레 언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붙잡혀간 사비니 여인들은 로마 남자들과 강제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곤 세월과 함께 고향 퀴리날레 언덕의 부모 형제 가족들을 잊어가면서 로마인 아내와 아기의 엄마들이 되어 갑니다.               


한편, 퀴리날레 언덕의 사비니 족 남자들은 그날의 악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매일 메일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드디어 몇 년 후 사비니 족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로마를 향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갑니다. 이번 공격에서 자기네 여인들을 기필코 되찾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초기 접전이 있은 후 양측의 대결전이 임박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는 사비니 여인들 심정은 처절합니다. 그녀들은 이미 로마인의 아내가 되어 아기도 낳고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던 중이죠. 이쪽은 지금의 남편이자 아기들의 아빠요, 저쪽은 고향의 부모요 오빠요 전 남편들인 것입니다. 그녀들 입장에선 반드시 이 싸움을 말려야 했습니다. 여인들은 너도 나도 아기를 안고 전장으로 달려갑니다.     


          

프랑스 파리 출신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날의 장면을 '사비니 여인들 중재(The Invention of the Sabine Women, 프랑스어: Les Sabines)'라는 제목으로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그림 속 여인들은 처절합니다. 고향의 부모 형제들인 사비니 족을 향하여 아기를 들어 보이며 제발 싸우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기도 합니다. 왼쪽은 사비니족, 오른쪽은 로마군, 그 사이로 한 여인은 양측이 서로 싸우지 못하도록 아기들을 내몰고 있습니다.      

         

흰 옷 입은 이 여인은 결연하게 두 팔을 벌려 양측을 만류합니다. 사비니 족 왕의 딸이지만 지금은 로마 왕 로물루스의 아내가 되어 있는 헤르실리아입니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사비니 족의 왕인 티투스 타티우스입니다. 딸의 만류에 칼을 내리고 방패를 연 채 엉거주춤 난처한 표정입니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로마 왕 로물루스는 단호합니다. 여차하면 장인어른에게 창을 던질 태세입니다. 반면에 로마 군인들은 정작 싸울 의사가 없어 보입니다.      

         

투구를 벗고 창에 꽂아 흔들거나 자기 아기를 높이 들어 올리고 있네요. 처가 식구들과 죽음을 건 싸움은 피하고 싶은 거죠. 로물루스가 들고 잇는 방패에는 'RoMA'란 글자가 선명합니다. 늑대 젖을 빨고 있는 어릴 적 자신과 죽은 동생 레무스의 모습도 새겨 놓았군요. 결국 사비니 왕은 로마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곤 창과 칼을 내려놓습니다. 내 딸과 내 손주들이 앞을 막아 나서는데 기어코 사위를 죽이려 싸울 수는 없는 거죠. 이 그림은 가로 5m가 넘는 대작입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 중입니다.               


결국 사비니족과 로마는 화해를 합니다. 장인 타티우스와 사위 레물루스는 더 나아가 두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여 공동 통치하기로 합의합니다. 이렇게 해서 로물루스는 장인 타티우스가 죽을 때까지 한동안 로마 7 언덕을 공동 통치하게 되고, 또한 미래의 로마제국으로 향하는 번영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납치돼 온 사비니 족 여인들이 후손을 낳아준 덕택에 팔라티노 언덕 마을의 로마는 일곱 언덕의 로마로 넓어지고, 이후 천 년 세월이 흐른 기원 200년쯤에는 팍스 로마나로 대변되는 위대한 로마제국으로 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오프닝 내레이션처럼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로마 황제의 지배 아래에서 살고 죽었’습니다.     

          


로마 여행의 피날레는 트레비 분수에서 장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수에 한 번 또는 두세 번 동전을 던져보며 앞날의 소망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트레비 분수는 로마 7 언덕 중 맨 북쪽인 퀴리날레 언덕의 언저리입니다. 언덕 위 퀴리날레 궁전의 광장에 올라 그 옛날 이곳에 살았던 사비니 여인들을 생각해 보는 것도 로마 여행에선 의미 있는 마무리겠습니다. 로마제국의 번영을 있게 한, 로마인들의 어머니 고향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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