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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철 Jun 29. 2024

영국사 숙명의 라이벌, 엘리자베스와 메리 여왕 5편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삶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스코틀랜드 여왕이 된 메리는 파리 최고의 환경에서 성장해 프랑스 왕비에까지 올랐으나 미망인이 되면서 내리막이 시작됐다. 이후 두 번의 결혼을 거치며 끝없이 추락한 끝에 지금처럼 고모뻘인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망명을 구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낳은 죄로 모친이 죽임을 당한 이래 외롭고 두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나 끝내 이겨내고 결국은 잉글랜드 여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여왕으로서 지난 10여 년간 엘리자베스에게 있어서 메리는 상당히 신경 쓰이고 거슬리는 라이벌 존재였다. 조카뻘인 메리 역시 잉글랜드 왕위 계승 서열 상위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왕위 계승을 지속적으로 부정하는 가톨릭 세력들이 메리를 지지해 왔고, 자신의 외모가 유럽 제일의 미녀로 소문난 메리와 비교되는 항간의 소문도 불쾌하지만 잘 듣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에 위태로웠던 자신의 왕권은 지난 10년을 보내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잡아가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난 메리가 망명 요청을 해온 것이다. 


메리가 런던에 머물 경우 자신의 입지에 위협이 될 수도 있겠지만, 라이벌인 조카를 자신의 감시와 통제 하에 두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한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망명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메리는 런던에 오자마자 재판을 받고는 성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보스웰 백작과 공모하여 전 남편 단리를 살해한 혐의에서 무죄라는 게 확실히 입증이 안 됐기 때문이다. 


항간에선 엘리자베스 여왕이 외모 때문에 메리를 질투하고 견제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이를 의식한 엘리자베스는 메리에게 비록 자유는 주지 않았지만 수감된 성 안에서만큼은 모자람 없이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외형상 지원은 아끼지 않았다. 어느덧 메리는 성에 감금된 채 20대 꽃다운 세월을 무심하게 다 썩혀 보내고 30대 나이로 접어들고 있었다. 


잉글랜드 내 가톨릭 세력 등 엘리자베스의 정적들에게 메리의 존재는 언젠가는 자신들에게 희망이 되어줄 등불이었다. 이를 잘 간파하고 있는 엘리자베스는 연금도 지급해 주는 등 메리에 대한 대우를 겉으로는 잘해줬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구금된 성을 이리저리 계속 옮기게 함으로써 측근이 안 생기게 하는 등 은밀하게 메리를 옥죄고 있었다. 


이렇게 성 안에 유폐된 채 메리는 어느덧 40대 초반에 들어섰다. 20대 후반부터 15년 넘게 갇힌 생활을 해오던 그녀는 그동안 고모인 엘리자베스에게 수없이 편지를 써 보내며 인정에 호소해 봤지만 여왕으로부터는 단 한 번의 회신도 받아보지 못했다. 그렇게 극찬받던 자신의 외모도 어느덧 세월에 씻겨 볼품이 없어져버렸다. 점점 자포자기 심정에 젖어들면서 메리는 비로소 여왕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있는 한 자신은 결코 죽을 때까지 성 밖으로 풀려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메리로선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비록 부당하게 폐위는 됐지만 스코틀랜드 여왕이자 차기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인 자신이 이렇게 외딴 성안에 갇혀 허무하게 삶을 끝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느덧 40대 중반에 들어서는 메리는 조급해졌다. 급기야 가톨릭 세력들과 은밀하게 서신을 주고받으며 모반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엘리자베스를 제거하고 메리를 옹립하려는 세력과 내통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왕실 안테나에 이미 다 포착이 되고 있었다. 결국은 메리가 스페인을 끌어들여 잉글랜드를 공격한다는 서신이 발각되고, 엘리자베스의 암살 계획에 가담한 정황까지 명확한 증거와 함께 밝혀지고 만다. 모반 주동자들이 모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얼마 후인 1578년 2월 8일, 핼쑥한 얼굴의 메리는 사형장에 목을 내밀고 옆으로 누웠다. 사형 집행인이 서툴렀는지 그의 도끼날이 여러 번 빗나가며 메리는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았다. 


44년 인생 중 절반은 영광스럽고 화려한 삶이었고, 절반은 잉글랜드의 외딴 성에 유폐된 절망 속의 삶이었다. 자신의 사형 집행을 최종 명령한 고모 엘리자베스 여왕과는 평상 동안 단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다. 여왕은 메리의 사형 집행을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사사로운 인정보다는 주변국과의 정치 상황과 국내 여론을 의식한 때문이다. 그러나 여왕의 측근 등 집권 신교 세력의 입장은 단호했다. 유럽 전역에 구교와 신교의 갈등이 첨예화되는 추세에서 메리의 존재는 언제나 국내외 구교 세력들에게 모반의 불씨가 되었기 때문이다. 단호한 처단이 불가피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1603년 3월 24일, 69세의 엘리자베스도 45년 재위를 뒤로하고 세상을 떠난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퇴하는 등 잉글랜드를 유럽 최강국에 올려놓은 위대한 군주의 삶이었다. 여왕은 눈을 감으며 16년 전 자신이 죽인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어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제임스 6세는 영국사 최초로 기존 웨일스와 아일랜드에 이어 스코틀랜드까지 병합해 통치하게 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향하는 발판이 이때 비로소 마련된 것이고, 오늘날 영국 국기인 유니언잭의 기원 또한 이때였다.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버림받고 참수된 여인의 딸 엘리자베스, 18년 동안 외딴 성 안에 갇혔다가 결국은 참수된 메리 스튜어트, 고모와 조카 사이인 두 여인의 숙명적 라이벌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영국사에 영광의 시대를 열어가는 밑거름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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