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겨울방학, 난 동계훈련

이쯤이면, 온 세상이 나의 운동을 돕는 것입니다.

by 아오리



유독 처리해야할 일이 많고 번잡스러운 12월 초였다. 12월은 원래 바쁜 달이지만, 올해 12월 초는 유독 더 그러했다. 정신없이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고 정신을 차릴 때 즈음, 두둥- 중2 딸아이의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두 달간의 특근’이 시작된 것이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점심식사, 간식 준비가 추가된다. 흔히 말하는 밥 차려주고 돌아서면 또 밥 해야 하는, ‘돌밥 기간‘인 것이다.

둘째, 아이의 생활-늦잠, 핸드폰 사용 관리, 부족한 학업 보충해 주기 등-을 컨트롤 해주어야 하는 과업이 늘어난다.

셋째,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눈에 거슬리는 게 많아지고, 나의 잔소리가 늘어난다. 그리고, ‘나만의 시간’이 줄어든다.



가장 두려운 단어, ‘삼시세끼’ ...고군분투한 흔적들!





바쁜 연말을 보내느라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런 변화를 맞닥뜨리게 되니 방학 첫 주에는 일상이 뒤엉킬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해외이삿짐이 도착하지 않아 거실에 앉을 곳이라고는 식탁밖에 없는 우리 집이긴 했지만, 방이 답답했는지 거실 식탁에 나와서 공부하는 딸을 거실에서 내쫓을 수는 없었다. 나는 구천을 떠도는 혼령처럼, 부엌일을 하다가 집 정리를 하다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집안 곳곳을 떠돌았다. 그러다가 어디에 앉아 쉬고 싶어 져도 침대에 눕기는 싫고 딸이 앉아 있는 식탁에 적당히 방해되지 않게 앉아 있기도 쉽지 않으니, 정말 집 안에서 갈 곳이 없는 기분이었다.


수험생이자 사춘기인 중2 딸과의 ’두 달 동안의 공존‘이 평화롭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에서 모두 각자의 영역이 필요했다.





선생님, 저 이제 개인운동
매일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딸이 방학했거든요.


헬스장에 매일 나오겠다는 나의 말에 트레이너 선생님께서 환하게 웃으셨다. 그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건, 두 달 전 선생님을 처음 만난 이후로 아마 처음 본 듯했다. 환한 미소로 반겨주셔서 감사했지만, 이것의 시작은 분명 나의 ’ 자의‘가 아니었다.


물론 한창 일주일에 두 번 수업에 개인운동도 두 번씩 더 나가면서 운동에 재미가 붙고 있던 시기이기는 했다. 하지만, 더 긴 시간을 내가 자유롭게 쓰지 못하고 그나마 ’ 대의명분‘이 있는, 운동 정도나 간신히 챙길 수 있는 상황이 마냥 기쁠 수는 없었다. (… 딸이 나중에라도 이 글을 볼 수도 있으니 돌려 돌려 적었지만, 쉽게 말해서 마음대로 놀러 다닐 수 없어서 심통이 났다는 뜻이다.)





그 후로부터 7주 동안, 나는 늦잠자는 딸의 아침식사를 간단하게 챙겨두고 나와 헬스장에 운동을 두 시간 하고 점심거리들을 장 봐서 집에 들어갔다. 우리는 반나절만에 식탁에서 다시 만나 반가운 얼굴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처음에는 왜 자기를 두고 자꾸 밖에 나가냐고 하던 딸도, 내가 오후에 PT 수업이 있어서 아침시간에 집에 있으면 “엄마, 운동 안 가?”라고 오히려 되물었다.



그래, 너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구나.
왜 아니겠어?





글쎄요? 아침형 인간이고 싶긴한데... 여튼 저도 지금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살면서 이렇게 매일 운동을 해 본 적이 있었을까?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PT 수업도 있고 수업에서 배운 것들을 혼자 해보는 재미로 나름 즐겁게 매일 헬스장에 가기는 했지만, 금요일 즈음이 되면 피곤하긴 했다.


‘운동 안 가면 뭘 하겠어. 뭐 집안일이나 하고 잔소리나 하게 되겠지.’라는 생각에 그래도 어쨌든 운동복을 챙겨 입고 꾸역꾸역 집을 나서 헬스장에 가면, 어쨌든 해내는 하루가 또 적립되었다. 너무너무 기운이 없었던 어떤 날에는 컨디션이 좋았던 날보다 더 덤벨이 가뿐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운동을 마치고 나면 몸은 개운했고 머리는 가벼워져 있었다.





매일이 비슷한 ‘운동하고, 밥하고, 집에서 할 일들 챙기는’ 동면 같은 루틴이 겨우내 이어졌다. 어느새 루틴에 익숙해져서 이 생활이 너무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던 차, 달력에 ‘3월’이라는 글씨가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개학, 봄이구나! 새 학기에 대한 기대와 준비로 번잡스러운 며칠을 보내고 아이는 다시 학교로, 나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두 달 여만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는 온전한 ‘Me-time’을 다시금 얻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운동복을 챙겨 입고 헬스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봄은 산수유꽃에서부터 시작됐건만.,, 왜 헬스장을 떠나질 못하니;;;




놀면 뭐 해, 가서 운동이나 해.


어쩔 수 없이 시작했던 방학 동안의 운동 루틴이 이제 나의 생활에 굳은살처럼 자리 잡아 버렸다. 겨울방학 동안의 ’ 동계훈련‘을 잘 마치고 나니, 어느새 내 몸에는 귀여운 이두와 탄탄해진 어깨가 탑재되어 있었다.


이제는 웨이트 트레이닝의 ‘초초보 단계’는 벗어난 것 같다고 스스로 느껴졌다. 기구를 세팅하는 것도, 벤치를 옮기는 것도 척척 혼자서 잘 해내는, 웨이트 트레이닝 100일 차 ’헬스장 오전타임 지박령‘이 되어 있었다.

겨우 내내 오전 9-11시, 남들이 보면 가소로웠겠지만 나름 혼자서 죽을동 애쓰며 ‘동계훈련’했던 프리웨이트존


습관이 형성되려면 90일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더니만, 그 말이 이렇게 찰떡같이 맞을 줄이야. 작년 11월에 PT수업을 등록하면서 ‘일주일에 두 번 PT 수업이나 빼먹지 말고 열심히 나가야지!’하고 생각했던 나였었다.


그러다가 트레이너 선생님의 부스터로 12월부터 개인운동을 주에 두 번씩 더 하기 시작했고, 우리 딸이 거기에 쐐기를 박아주며 1,2월 두 달간 나를 주 6일 운동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적시적소에 내가 운동 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묵직하게 붙잡아주는 ’ 조력자‘들이 있었다니! 이쯤이면, 온 세상이 지금 나의 운동을 돕고 있는 것 아닌가!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더욱더 힘을 내어 바벨을 들라 하신다!





이 글의 끝에는 ‘Thanks to’를 붙이지 않을 수 없는데, 우리 딸이 방학 내내 혼자 잘 일어나서 자기 할 일 묵묵하게 잘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두 달 동안 겨우겨우 PT 수업조차도 간신히 나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항상 자기 몫을 스스로 잘 챙겨주는 우리 딸 주원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엄마가 동결건조는 될 수 없지만,
운동 열심히 해서 오래오래 옆에 있어줄게!
사랑해, 우리 딸!


우리 둘이 이렇게 배낭 하나씩 메고 놀러갈 수 있는 날, 또 곧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