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의 목록이 늘어날수록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친구는 시아준수팬입니다. 새 앨범이 나오면 CD를 사서 친구들에게 나눠줍니다. CD 플레이어 고장 났다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준수가 출연하는 뮤지컬 공연 예매를 위해 인터파크에 동시 접속하라고 우리를 달달 볶습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가 멋있습니다. 이제 어디서든 시아준수를 보면 자연히 친구가 떠오릅니다. 자신을 떠올릴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멋있는 일입니다.
남들이 다 짜장면을 시킬 때 혼자 "짬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짬뽕인지 짜장면인지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긴 시간 동안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이나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하라고 할 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음식 가리지 않는 무난한 식성을 앞세워 친구나 가족에게 메뉴 결정권을 넘겨주었고, 가지고 싶은 것은 필요한 것 뒤로 미뤄둔 채 생각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선택권이 생겼을 때 선택할 만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선택의 기준이 없으니 선택하지 못했고 선택하지 않으니 취향을 발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제 저도 나만의 취향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합니다. 좋아하는 음식과 받고 싶은 선물까지 제가 좋아하는 것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봅니다.
- 오이와 양파와 생선과 복숭아와 중국술 좋아합니다.
- 샤넬향보다 디올 어딕트 오드퍼퓸 향을 좋아합니다.
- 몸매와 상관없이 눈치 보지 않는 자유로운 옷차림을 좋아합니다.
- 조용한 카페와 둥그런 탁자가 놓인 술집을 좋아합니다
- 국민가수 김동현의 맑은 음색을 좋아합니다.
- 방바닥을 뒹굴며 재미있는 소설 읽기를 좋아합니다.
- 밀가루보다 쌀로 만든 음식을 좋아합니다.
- 요가와 골프, 수영을 좋아합니다
- 낯선 도시의 불빛을 좋아합니다.
- 논리 수학 문제 풀기를 좋아합니다.
- 도서관에서 몰입하여 글 쓰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 그늘진 곳에 앉아 창가로 쏟아지는 아침햇살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룽고 디카페인 커피를 좋아합니다. 제 커피 취향은 룽고 디카페인을 권장량보다 2배 많은 물을 부어 뜨겁게 마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게 커피냐고 할 정도로 연하지만 그게 제가 좋아하는 맛입니다. 눈을 뜨고 신선한 커피를 마실 생각에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더 즐거워졌습니다.
자신만의 취향을 가진다는 것은 삶에 작은 즐거움을 심어두는 일입니다. 좋아하는 노래와 맛있는 커피, 기분 좋아지는 향수 같은 취향은 모호한 삶을 견디는 순간순간 위로가 되어줍니다.
그러나, 취향이 한순간에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국 음식을 먹어봐야 똠양꿍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고 여러 장르의 노래를 듣고 난 후에 내가 무슨 노래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다양하고 좋은 것을 경험해 보려고 합니다. 취향도 내가 경험한 범위 내에서 선택할 수 있을 테니깐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적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입니다. 계속 좋아하는 것의 목록을 적어나가려면 일상의 경험을 흘려보내지 않고 감각을 세워 취향의 순간을 알아차려야 하겠지요. 애호의 목록이 늘어날수록 삶은 여유롭고 풍요로워집니다. 뚜렷한 취향은 선택의 기준점이 되어주고 희미한 삶의 여백을 채워줍니다. 자신만의 확실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마침내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답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