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가 울리면 식사하던 모습 그대로 잠시 멈춥니다.
아침부터 몸이 찌뿌둥한 날은 어김없이 전 날 야식을 먹은 날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밤에 라면을 먹어도 우유 한 모금 마시고 나면 나트륨쯤 문제없었고 탄수화물은 금방 소화되어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밤새 소화기관이 움직이는 에너지가 느껴져 숙면을 취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밤 9시의 유혹은 어찌나 강한지 뿌리치지 못하고 배달음식에 손을 대게 됩니다. 습자지처럼 얇은 의지로 딸과 남편이 풍기는 치킨 냄새를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금욕주의는커녕 쾌락주의에 가깝습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절제대신 환호를 외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지난해 가을 충주에 있는 '깊은 산속 옹달샘'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은 아침편지로 유명한 고도원 님이 운영하는 명상치유센터입니다. 소박한 잠자리와 자연식으로 잘 차려진 뷔페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가벼운 산행 후 커다란 접시 가득 음식을 덜어 신나게 먹는 데 갑자기 '땡'하는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종소리는 맑고 깊게 울려 퍼졌습니다. 앞자리에 앉아 입을 한껏 벌리고 숟가락을 밀어 넣던 지인, 고개를 숙이고 바쁘게 음식을 씹던 옆사람, 나물을 집어 올리던 친구의 젓가락이 그대로 잠시 멈추었습니다. '종소리가 울리면 식사하던 모습 그대로 잠시 멈춥니다' 하는 식사 중 얼음 땡을 안내를 받기는 했지만 실제로 밥 먹던 동작 그대로 멈추고 보니, 비로소 음식 앞에서 흥분해 있던 제 모습이 정지화면으로 보였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면 엄마와 아빠가 풍성하게 차려진 신들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장면이 있습니다. 다정하고 믿음직했던 부모님이 맛있는 음식 앞에서 이성의 끈을 놓고 정신없이 먹다가 점점 돼지로 변하는 모습은 공포물에 가까웠습니다. 제 안에 어떤 모습을 들킨 것처럼 뜨끔했기 때문입니다. 맹목적인 식탐의 끝이 무엇인지 극단적이지만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통제하기 힘든 본능 중의 하나가 식탐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절제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맛있게 먹다가 배 부르다고 바로 숟가락을 놓는 사람은 위인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배 부르다'고 말은 하면서도 연신 음식을 입으로 가져갑니다. 예전에는 생리기간이 되면 평소에 안 먹던 빵이나 과자도 많이 먹었습니다. 주변에 저와 비슷한 친구들이 제법 있었는데 생리에 따른 호르몬의 변화로 그렇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음식으로 푸는 것도 신경전달호르몬 영향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은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최대로 에너지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코르티솔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이 호르몬이 뇌에 전달되어 식탐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식탐은 사람마다 크기만 다를 뿐 애초부터 내재된 감각 같습니다.
영화얘기가 나온 김에 최근에 본 영화 얘기도 하고 싶습니다. '더 웨일'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은 272kg의 몸을 가진 남자입니다. 자신의 제자와 사랑에 빠져 부인과 딸을 버린 인물입니다. 그런데 같이 도망친 자신의 게이연인이 자살하자 혼자 남겨진 주인공은 스스로 돌보기를 포기해 버리고 결국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괴로움,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죄책감등을 오로지 본능인 식탐으로 견디다 보니 '웨일' 같은 몸속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식탐으로 견딘 것이 아니라 식탐으로 자신을 벌했다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음식은 이렇듯 쾌락을 주기도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충주옹달샘에서 들었던 맑은 종소리를 기억하려고 합니다. 식사 중 얼음 땡으로 잠시 멈춰서 제 속도를 살펴봅니다. 맛있다는 감각에 취해 배부름의 신호를 놓치고 있지 않는지,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다음 입을 먹으려는 것은 아닌지 살펴봅니다. 무엇보다 지금 내가 먹는 음식이 허기진 몸을 채우는 것인지 허전한 마음을 채우는 것인지 알아차리려고 합니다. 어느 쪽이든 위안이 되는 음식은 되도록 천천히 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