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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쇠책방 Jan 25. 2024

당신의 이야기를 너무 모르고 산 것이 아닐까

장례식장에서


장례식장에 은은하게 찬송가가 퍼진다. 기독교식의 단출한 장례 의식이 익숙해졌다. 향을 피우지 않는다. 내 장례식장이나 가족의 장례식에도 향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향보다는 달콤한 냄새가 나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이어지다가 순간 국화꽃이 눈에 들어왔다. 국화향이 날까? 맡아볼 수는 없었다. 무색무취로 돌아가신 고인을 닮았기에 아무려면 어때하고 상주와 인사를 하고 비어있는 테이블에 앉는다.



고인의 큰아들과 함께 20년 전 직장 동료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이다. 나의 남편과 그는 이종 사촌이기도 하고 옛 직장 동료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모인 10여명의 동료들은 이제 모두 20대가 아닌 40대가 되었다. 얘기하다 보니 세월이 준 나이에 걸맞아진 외모 말고는 말투까지 그대로라는 걸 서로가 알게 된다. 젊은 대신에 무지했던 날들을 회상하며 장례식장인 것도 잊고 깔깔 웃었다. 그때의 이야기만으로도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었다. 꿈과 열정이 가득했던 청춘들은 아니었지만 사랑의 총알이 빗발쳤다. 지금의 자신보다 좀 더 근사한 삶을 꿈꾸었을 나이로 돌아간다. 그때 해보지 못한 다른 선택에 대한 아쉬움도 토해 보곤 했다.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이렇게 또 보자. 자주 보고 밥 한 번씩은 먹자”하고 주차장에서 긴 인사를 나눈다. 그들의 쿨하지 못한 안녕은 이제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알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마도 몇 년 뒤에나 또 이렇게 가족의 경조사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공유된 기억만이 나를 슬프게 한다


집에 돌아와 장례식에서의 일을 다시 곱씹고 있다. 웃고 와서인지 고인에게 애도를 다하지 못한 것 같은 미안함이 생겨서였다. 장례식은 한산했다. 울면서 복도를 걸어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울음이 유가족도 잠시 울 수 있게 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고인과의 추억이 전혀 없던 나는 울지 못했다. 고인을 보내고 슬퍼서 울 수 있는 추억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도 울지 않는 장례식장은  티낼수 없이 괜히 더 슬퍼진다. 뭔가 사연이 있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도 울지 않았던 뫼르소는 안으로 훨씬 더 울지 않았을까. 고인에게도 우리가 지나온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인에게도 우리가 지나온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숨겨진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일부러 숨기는 것은 아니지만 드러내서 얘기하지도 않는 이야기. 아무도 물어주지 않기에 한 번도 얘기되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



애도의 의무라도 되는 듯이 나는 고인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었다. 사람들과 웃는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귀를 열고 이야기를 찾았다. 듣는 무례함을 보인다. 그래서 알게 된 고인이 가지고 있던 이야기의 일부분을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와 합치면 이러하다.


고인이 중년이 되기도 전의 어느 날, 아직 어렸던 작은 아들에게 사고가 있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다. 여러 번의 뇌출혈 수술을 통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늘어난 병원비를 온 가족이 감당하면서 사는 동안 가족 모두가 힘들었다. 작은 아들은 이후로 성인이 되고도 제대로 된 경제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의 나이도  벌써 마흔이 넘었다.  병원비와 생활비로 젊은 날에 남들보다 몇 배로 고생한 큰아들도 이제 오십의 나이를 바라본다.  어머니는 76세에 고인이 되셨다. 모두가 피어보지 못한 꽃처럼 애잔했다.


고인이 살아내신 날들을 무엇으로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대로 끝나도 되는 걸까? 고인은 이제 어떻게 기억되고 남을까?  한 인간에게 깊이 다가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지 모른다. 가장 가까이 있던 가족일지라도 고인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고인에 대한 것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많이 와주신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짧더라도 생의 한 단면을 함께 한 사람들이 모여 고인의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 고인을 잘 보내드리는 일. 롤링페이퍼라도 써서 분향하고 싶어졌다. 이야기를 통해 고인의 삶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삶이었든 고생 많으셨고 이제 편안해지시라고 말하고 싶었다. 특별하지도 평범하지도 못했던 삶이 무겁게 다가온다. 이야기되어 보지도 못한 삶이 초라하고 허무해 보인다. 그래서 결국 슬펐다. 고인의 이야기에는 더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어머니를 가장 힘들게 하였던 아픈 손가락. 작은 아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기쁨을 드리고 싶었을 아들일 텐데 마음처럼 되지 않은 삶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는 공간에 앉아서 사람들의 웃음에 끼지 않으려 했다. 그를 찾아오는 조문객도 없었다. 상주자리를 지키고서 사람들이 없을 때에 혼자 눈물을 훔쳤다. 그를 위로할 말이 세상에 있기는 할까. 나는 고인의 마음이 되어 그를 쓰다듬고 안아주고 싶었다. 고인은 안 계시지만 가족들에겐 늘 살아 있는 어머니가 될 것이다. 자식들은 어머니 생전에 나누지 못한 말을 오래 도록 자기 안에서 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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