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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쇠책방 Feb 01. 2024

변신, 프란츠 카프카

탈피


이렇게 춥지 않은 겨울을 맞다니, 내가 항상 좋다고 느끼며 살았던 지난번 집이 여기서 돌이켜 보니 아주 추운 곳이었다. 웃풍이 있는 곳이었고, 시틈에 생긴 길로 바람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이중창 시스템 창호가 이렇게 조용하고 따뜻하고 아늑한 줄 모르고 살았네. 예전에 살던 집에 추억이 많아서 다시 가고 싶은 곳이라 말했었지만 절대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것 같아 슬퍼진다. 탈피 같기도 하다. 분명 내가 들어있던 나의 모습이지만 한 번 나오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가 없다. 그게 순리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 원가족에서 떨어져 나와 내 가족을 꾸렸고 이젠 내 집이라 부르는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원가족이 있는 친정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탈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변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집엔 다행히 이 따뜻하게 오래 들어서 추운 줄 몰랐다.  그 볕이 아니었다면 참 추웠을 텐데, 거실에 있던 원목의 베란다 중창이 있는 것도 참 다행이었다. 한기로부터의 가림막. 한기와 온기 사이의 공간. 그것이 아니었으면 분명 추웠을 테다.  꼭  볕 같은 엄마. 이중창 사이 공간에 놓인 엄마. 나는 그동안 볕이 좋아서 추워도 추운 줄 모르고 잘 지냈구나 뒤늦게 감사한다. 내가 그렇게 온기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한기를 견뎌준 덕분이란 걸 이제 안다.



나는 나를, 그리고 내 인생을 한 곳에 뿌리내리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라고 생각했었다. 엄마가 그랬기 때문이다. 자신의 양분을 거두어 열매로 열매로 모두 밀어 올리고 앙상한 몸뚱이만 남은 엄마 나무를 가엾이 본다.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레고르 잠자는 침대 속에서 자신이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있음을 깨달았다.



<변신>을 읽으며 인간 세상의 단면을 느꼈었다. 소외된 사회의 민낯이라고 해야 할까? 가족의 소외감과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내게 깊이 파고들었다. 그것은 그레고르등에 맞은 사과 같았다. 독한 무기는 아니었지만 깊이 박힌 상처가 되었다. 아무도 빼내주지 않고 자신도 뺄 수 없어서 결국 살을 곪아버리게 한 그 사과다.



방 안에서 벌레로 변해 버린 그레고르는 나의 친정오빠 같았다. 어느 날 경제적 역할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레고르와 다르지 않았다. 그 방에서 왜 기어 나와 돌아다니냐고 소리치며 사과를 던졌던 그레고르의 아버지란 사람 역시 내 아버지 같았다. 아버지는 오빠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쓰다 버린 연자에 거미줄이 쳐지듯 오빠가 왜 벌레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는 자신을 똑같이 닮은 이 벌레가 싫고 무섭기까지 하다는 것에 대해 그 자신도 잘 알지 못한다. 둘은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고 끝내 서로의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인간이기를 기억하고 언젠가는 인간으로 돌아오라는 바람을 가졌던 그레고르의 여동생은 처음엔 벌레가 된 오빠를 잘 돌봤었다. 음식을 가져다주고 청소도 해주고 여동생만이 그 방에 들어갈 수 있다. 벌레가 된 아들을 처음엔 안쓰러워하며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기대하던 어머니가 있었다.  벌레가 되었어도 그 방에서 그레고르의 가구와 물건들을 치우지 않으려 했던 어머니와 방 안에서 잘 기어 다닐 수 있게 배려하며 짐을 치워주어야 한다던 동생의 모습이 보인다. 변신을 인정한다는 것이 포기인지 다른 희망인지 나는 갸우뚱한다. 내가 보기에 어머니는 인간의 조건으로 여동생은 벌레의 조건으로 배려하는 듯했으나 결국은 가족 모두가 그레고르가 방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집안에 일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려워진 형편 때문에 하숙을 시작하는데 사람들로 복잡해진 집의 못쓰는 물건들과 쓰레기까지 그레고리 방으로 몰아 쑤셔 넣던 때부터 아마 그레고리는 가두어졌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을 테다. 


19세기 동안 유럽의 인구는 2억에서 4억으로 두 배가 되었고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의 일자리 경쟁은 치열했다. 어느 청년이 일을 마친 고된 몸으로 집에 돌아온 날, 그는 몸이 심하게 아팠고 꼼짝 할 수도 없이 자기 방 침대 구석에서 앓고 있지 않았을까. 사지는 죽은 채로 머리만 굴리며 바깥의 상황에 귀를 열지 않았을까. 자신의 의지로 꼼짝 할 수 없는 상황이 그를 무력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이기려면 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몸을 일으켜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그는 시도했지만 고꾸라진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참고 받아 들이기로 했는지 모른다. 자기 자신의 어떤 것에도 후회를 남기지 않고 무덤에 걸맞은 최후의 안식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스스로를 고양시켰으리라. 누군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다가 말없이 층계를 올라 자기방에 들어서는 동안이 가장 고독스러울 뿐이다.




나를 기대해 주는 사람들 곁에 있어라.

그것이 너의 정신을 살아 숨 쉬게 하도록.


사람은 언제 죽는가?

육체의 죽음 이전에 정신이 먼저 죽어버리곤 한다. 내가 나인 것을 잊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그레고르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는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남은 세 가족은 애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외식을 하러 간다. 경제 활동을 시작한 여동생이 사회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있어 보였다.

  



가만 보자 사랑?

나는 정말 내 가족들을 사랑했나?

솔직하게는 사랑!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애증이 되어버린 관계들을 사랑이라 믿고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묻는다.  사랑?

어떤 사람 때문에 눈물이 난다면 그것은 사랑이 맞다고 생각한다. 눈물. 그중에서도 더 잘해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눈물이 난다거나 내 마음이 아프다면 그것은 사랑이 맞는 것 같다.



부모님, 형제자매조차 순수하게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 고통이 집집마다 있다는 것이 세상이 가진 가장 큰 아이러니가 아닐까. 사랑해서 시작된 가족이라는 관계가 아프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에겐 대화가 부족했으리라. 대화의 방법도 몰랐으리라. 미안함과 죄책감이 족쇄가 되어 스스로를 더 가두는지도 모른다.



당신에게도 묻고 싶어 진다. 부모님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나도 단박에 "네 사랑합니다."  늘 그렇게 말해왔었지만 내 사랑은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탈피하고 나온 친정이 안녕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던가. 친정 부모님이 벌레가 되었다면 어쩌려고?


그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한참 읽던 중에 마침 아이의 교에서 이런 질문이 잠깐 유행했었다.

"엄마? 내가 벌레가 되면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벌레를 사랑하며 지금처럼 잘 살지."



아이를 키우면서는 사랑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뭔가? 나 역시 그런 사랑으로 컸을 텐데 무엇이 다르다고 친정은 부담이고 내 새끼는 사랑인 건가? 



무엇보다 찾고 싶은 것은 내 안의 사랑이었다.

부모님을 각하면 누가 뭐래도 사랑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나는데 나는 왜 자꾸 사랑이 아닐까 봐 걱정스러운 걸까...


[변신]은 주어진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적응하면서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꿈에 도전하면서 살아가느냐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숙제로 남겼다.



또 한 번 여기가 바닥임을 돌아본다.

감정의 가장 끝. 바닥이다.

솔직해져 보았고 후련하고 얼마쯤 가벼워진다.

우리는 모두, 모든 방법으로 변신 중이다.


by 열쇠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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