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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미영 May 08. 2020

나의 인생 멘토는 어머니

내 인생에 가장 슬픈 어버이날

1977년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가곡리

우리 마을은 대구로 가는 버스가 하루 두번 지나갔는데 그마저도 꼬박 세시간을 달려야 간신히 대구 북부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을 만큼 시골 마을이었다.


우리 식구는 총 다섯 명이었다. 멀리 대구로 유학 간 여섯살 많은 오빠, 네살 어린 여동생, 지방의 말단 공무원을 하다가 일찌감치 은퇴한 아버지, 그리고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생활전선에서 고군분투 하는 어머니와 국민학교 4학년 나.


아버지는 쉰살이 되기 전부터 스스로를 노인으로 규정하며 모든 노동으로부터 은퇴하였기에 가족을 먹여살리는 것은 오로지 어머니의 역할이었다. 조그만 농사와 갖은 품앗이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오던 어머니는 혼자 농사를 지어서는 가족의 생계는 근근이 하더라도 자식 셋 공부시키기는 어렵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마침 학교 가는 길에 천연 벽지 공장이 생겼다. 난생 처음 보는 커다란 회색 벽돌 건물이 뭐 하는 곳인지 동네 꼬마들은 무지 궁금해 했었다. 나중에 어른들 말을 들어보니 그곳은 칡실로 베를 짜서 종이에 붙이고 염색을 해서 벽지를 만드는 공장이라고 했다. 이렇게 만든 벽지는 서양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여 유럽으로 전량 수출된다고 했다.


칡을 가공하여 천연벽지를 만드는 공장은 호랑이가 나온다는 봉화의 산골 마을에 안성맞춤이었다. 추수가 끝나면 군불을 때고 방방이 모여 놀던 시골 아낙들은 벽지공장이 생긴 뒤 부터 칡으로 실 엮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은 농한기의 소일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덕분에 아낙들은 쌈지돈도 벌 수 있었다. 칡껍질을 얇게 찢어 잇는 것이 엄청 지루한 작업이지만 아낙네들은 때론 수다를 떨며, 때론 누가 더 빨리하는지 경쟁하면서 새로 생긴 일거리에 몰두를 하고 있었다.


“김씨네가 돈을 그리 많이 번다더라”


그 날의 수다 주제는 공장에서 칡을 받아다 아낙들에게 나눠주고 완성된 실꾸러미를 납품하는 김사장이 돈을 많이 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아낙네들은 금새 다른 이야깃거리로 수다를 이어갔지만, 어머니에겐 이게 머리 속에서 계속 맴돌았나 보다. 며칠 고민하던 엄마는 나를 불러서 우리도 소일거리를 할 게 아니라 김씨네처럼 칡껍질을 받아다가 나눠주고 다시 거둬 납품하는 사업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그 사업을 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공장이 들어온 지 이삼년이 지난 뒤라, 아랫마을 김씨네가 납품을 독점하고 있었다. 우리도 김씨네처럼 그 사업을 하려면 우선 공장장한테서 허락을 받아야 할텐데 기존에 잘하고 있던 김씨네를 두고 사업 경력도 없는 우리한테 무슨 수로 일감을 줄 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 먹은지 얼마 안돼서 훌쩍 공급권을 따 내 오셨다. 어머니는 공장 측에, 독점보다는 경쟁체제를 도입하는 것이 공장의 입장에서 득이 된다는 것을 설득하셨댔다. 작업 품질도 높이고 인접한 면으로까지 작업자들을 확대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아이들 셋 공부를 시켜야하니 도와달라고 인간적인 호소도 했다 한다.


소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인 신출내기 사장 어머니와 국민학교 4학년 딸의 사업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어머니는 십리 이십리 떨어진 산골 마을들을 찾아 다니며 우리의 존재를 알리고 김사장네로 가던 고객을 우리집으로 빼앗아 오는 일을 담당하고 나는 대학노트에 고객별 거래 내역을 기록하는 장부 관리를 담당하기로 했다.


공장과의 거래 조건도 어머니의 탁월한 사업제안과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우리에겐 아직 가장 큰 고비가 남아 있었다. 고객인 시골 아주머니들 대부분은 십리 이상 떨어진 조그만 마을들에 흩어져 살았고 그들이 완성된 실꾸러미를 납품하고 새로운 일감을 받아가는 날이 주로 장날이었다. 그런데 장터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에 있었던 김씨네 집에 비해 장터에서 모퉁이를 하나 지나서야 간신히 보이던 우리집은 아낙네들이 일감을 한아름 머리에 이고 오가기엔 너무 멀었던 것이다.


우리 집이 너무 멀어서 손님이 하나도 없을까봐 시골 꼬마는 11년 인생 최대의 고뇌를 하고 있었다. 한편 저 무심한 초겨울 바람은 사업 시작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어머니가 평소 세배쯤 되는 양으로 김장을 하고 있었는데, 아, 엄마도 포기를 했나 싶었다. 벽지공장에 칡실 납품하는 장사는 접어두고 김치장사를 하시려나? 김장독을 묻을 구덩이도 두어개나 늘어나 있었다.


기어코 장날이 돌아왔다. 

그 날은 우리가 처음으로 아주머니 고객들을 대면하게 되는 날이었다. 이른 새벽 잠에서 깨어보니 어머니는 명절 때나 쓰던 가마솥에 밥을 한 솥 가득 하고 있었다. 해가 뜨기 시작하니 삼삼오오, 장날이라고 차려입은 아주머니들이 집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차. 어머니는 장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을 아주머니들을 위해 아침 밥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을 보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선 고객들은 늘 허기가 졌었고 새벽부터 밥을 지어 따뜻해진 아랫목에서 먹는 쌀밥에 김치, 된장국 한그릇에 고객들은 기꺼이 수백미터를 더 걸어왔던 것이다.


시골 아주머니들을 장터에서 먼 우리집까지 오게 하기에 김장김치와 국은 충분한 동기가 되었던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날 아침 우리집에 들러 일감도 정산하고 든든한 아침밥도 얻어먹고 가는 게 시골 아주머니들의 코스가 되었다. 장날마다 우리집으로 찾아오는 고객들이 늘기 시작했고 급기야 두세해만에 우리집 단골 고객이 집도 장터에서 가깝고 사업도 몇 년 일찍 시작한 김씨네를 넘어서게 되었다.


점점 더 늘어난 고객 덕에 나의 겨울 방학은 늘 바빴다. ‘우총무’라는 호칭에 나는 신이 났고 계산기도 없이 암산으로 장부정리를 척척 해 냈다. 여담이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수학문제를 틀려본 적이 없었던 비결은 바로 장부정리로 다져진 암산실력 덕분이라 생각된다.


비록 벽지 산업이 사양화 되어 사업이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우리집의 사업 덕분에 대구로 유학간 오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까지 진학할 수 있었고 동생과 나도 안동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IT 스타트업 회사에 첫발을 들여놓은 이래 30년 가까이 IT분야에서 잔뼈가 굵어온 나에게는 좋은가르침을 주시던 훌륭한 선배들이 있었지만, 나에게 최고의 멘토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나의 어머니’라고 말하겠다.


어린시절 봉화 산골 어머니의 모습에서 사업기획, 제안, 고객응대, 비즈니스 협상까지 모두 배울 수 있었다. 그 중 핵심이 되는 철학은 바로 ‘고객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과 진정으로 공감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내가 IT 영업을 시작하고 팀장이 되고 또 회사를 경영하면서 몸에 익은 듯 발휘할 수 있었던 능력들은 봉화 산골에서 시작된 것 같다.


아...작년 이맘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운 어버이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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