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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훈 Jan 12. 2022

죽어가는물고기의사연

1. 뜨거운 물줄기가 두피에 닿고 머리 위에서 흘러내린다. 시야는 흐려지고 바닥에서는 김이 올라와 후끈한 공기에 몽롱해지는 기분이 든다. 한국을 떠나와 미국 대학을 다니면서 항상 즐겨 듣었던 자우림 노래가 화장실 타일을 타고 웅얼웅얼 울려퍼졌다. 흐느끼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맞추어 구슬픈 가사와 단조의 멜로디를 따라 불렀다. 모든 게 다 씻겨 나가는 개운함이 들고 집에 온 듯한 편안함에 마음이 잔잔해졌다.


그러다가 이 방 밖 누군가의 귀에 한국 노래와 한국 노랫말이 우습게 들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귀에 들리는 내 슬픈 정서도 우습게 들릴 것 같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그 귀의 주인은 어떤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미국인하면 떠오르는 추상적인 아이디어였다.









2. 평생 깊은 바다에서 살아온 물고기에게 물의 존재를 설명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그 물고기를 뭍에 가져다 놓으면 (아마)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이고 입을 뻐끔뻐끔거리며 꼬리를 바닥에 치고 몸부림칠 것이다. 요즘 강박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내 관심사는 그 죽어가는 물고기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머리로 안다. 물은 그 물고기가 살아가는데 근본이 되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고기는 평생을 그 안에서 살아왔고 그것의 부재를 인식한 적이 없다. 물 밖에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우리는 관념적으로는 물고기의 고통을 이해하지만 본질적으로 그의 고통을 체험할 수 없다. 과연 우리가 해안가 나무 판자에서 몸부림치는 물고기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동정심만이 담겨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기에 필요하지 않는 것을 필요로 하는 그의 모습이 우스워보이는 감정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 시선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3. 나는 죽어가는 물고기일까. 나를 건져올린 낚시꾼의 시선이 따가웠다. 낚시꾼은 혀를 끌끌 찼다. 그의 성에 차는 크기가 아니었나보다. 어린 물고기를 건져올린 죄책감인 것일까? 아니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의무 때문이었을까? 그는 눈을 잠시 찡그렸다.


차갑고 딱딱한 나무 판자에 올려진 내 비늘을 느끼며 열심히 위아래로 펄떡였다. 바로 앞에 수평으로 갈린 바다가 보였다. 자그맣게 파동이 이는 수평선 저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고 해안가 파도 치는 소리는 사랑하는 이의 심장 박동처럼 평안한 느낌을 주었다. 낯선 이 땅의 노스탤지어에 젖어 있다보니 나도 내 헐떡임이 우스워 보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를 비웃었다. 위아래 움직임이 더이상 의미가 없는 것 같아 그것을 멈추고 숨만 깊게 헐떡였다. 심하게 요동치는 심장박동에 살이 부풀어오르고 꺼지고를 반복했는데 그럴 때마다 몸 한 쪽에서 나무의 압력이 비늘에 느껴졌다. 그 압력은 처음엔 고통으로 다가오다가 서서히 익숙해졌다. 차가운 나무가 내 몸과 같이 부풀어오르고 꺼지는 듯했다. 낚시꾼은 수직에서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견딜 수 없이 표면적인 동정이 담겨있어 몸속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바닷물이 식도를 타고 올라올 것 같았다. 눈을 돌리고 이내 감았다. 부풀대로 부푼 심장에 이제는 곧 붉은 살까지 군데군데 비집고 나와 펑 터질 것 같았다.


멀리서 내리쬐는 주황빛 비늘을 두른 석양이 뚜벅뚜벅 수평선을 걸어오더니 결국 시각의 전부를 차지했고 나는 마침내 물로부터, 낚시꾼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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