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야기
'찡'하다 '쿵'한다. 그래픽 노블 『로봇 드림 ROBOT DREAMS』 그리고 『주름 ARRUGAS』
오늘은 우연히 읽고 난 후 만나는 사람마다 필독을 권하고 있는 두 권의 책 이야기를 나눕니다.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어 책이 아닌 영상으로 먼저 본 분도 계실 거예요.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먼저 책을 보고 나중에 영상을 보길 권해드립니다. 영상 속에서 확장된 이야기를 접하기 전, 책을 통해 상상하는 재미가 있거든요. 결말도 약간 차이가 있고요.
『로봇 드림 Robot Dreams』은 애니메이션을 본 후 원작을 찾아 읽은 그래픽 노블입니다. 베이징의 한 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봤는데, 매대 가득 진열된 이 책에 당시에는 흥미가 없었어요. 인연이 되려 그랬는지 다른 걸 검색하다 애니메이션이 있다는 걸 알았고, 큰 기대 없이 봤는데, 보고 난 후 자연스레 원작이 궁금해지더군요.
미국 그래픽 노블리스트, 작가, 일러스트레이터인 사라 바론(Sara Varon)의 2007년작 『로봇 드림 Robot Dreams 』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출세작입니다. 스페인의 파블로 베르헤르(Pablo Berger, 1963~) 감독이 원작을 기반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이 영화가 2023년 칸영화제에 출품되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2023년 시체스영화제 관객상, 2023년 부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관객상, 2024년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상 노미네이트 등 숱한 화제 및 수상 경력을 더하며 더 널리 알려졌고, 그 인기로, 절판되었던 책이 다시 독자와 만나게 되었죠.
『로봇 드림 Robot Dreams 』은 개와 로봇의 우정 이야기예요. 책과 영화 모두 텍스트가 등장하지 않는, 오로지 이미지로만 내용을 전하죠.(의성어와 의태어는 나옵니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소중한 감정의 모습입니다. 휴머노이드 로봇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시대이니 시대 배경은 기술이 꽤 발달된 미래 언젠가이겠지만, 작품 배경지인 뉴욕이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고 의인화된 동물이 주인공이니, 특정 시점을 추측하는 건 의미가 없겠네요.
이야기는 일상의 지루함을 느끼던 '개'가 반려 로봇을 구입해 조립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새 친구에 대한 충만한 기대감으로 로봇과 첫 만남을 가진 '개'는, 서로에 대해 무조건적인 호감을 표시하며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죠.
이들은 금세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었고, 소소한 것들을 공유합니다. 세상 혼자라고 느꼈던 '개'는 '로봇'을 통해 삶의 즐거움을 깨닫게 되고, '로봇' 역시 생애 첫 경험들을 '개'와 함께 하며 잊지 못할 추억을 쌓죠. 둘의 관계는 그렇게 나날이 깊어집니다.
저는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이 참 좋았어요. 가식 없이 드러나는 꽉 찬 미소와 상대를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신뢰하고 있는지가 보였거든요. 사랑과 우정 사이를 넘나들던 그들은, 함께 갈 여행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꿈같은 여행은 악몽이 되고, 이들에겐 큰 시련이 닥쳐요. 이 부분은 직접 보셔야 해요.
해변가 장면 묘사는 책과 영화가 좀 다른데, 저는 영화적 서술이 더 마음에 듭니다. '개'가 '로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얼마나 구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디테일이 더 살아있어서요. 결국, '개'는 '로봇'을 구하지 못했고, '개'는 이전보다 더 어두운 일상을 만나게 되죠. 남겨진 '로봇' 역시 '개'를 그리워하며 세월을 견뎌내고, 그렇게 계절은 흘러 다시 여름 해변가로 시간을 옮겨 놓습니다.
하지만 만반의 준비를 마친 '개'가 '로봇'을 되찾으러 갔을 땐 이미 '로봇'이 없어진 후였죠. '로봇'은 고철로 팔려갔고, '개'는 극심한 상실에 한동안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낸 둘에게 다시 누군가가 찾아옵니다. '개'에겐 새로운 '로봇'이, 로봇에게도 새 삶을 찾아 준 새로운 친구가 곁에 있게 되죠.
서로 다른 삶에 젖어들 때쯤, 우연히 '로봇'이 '개'를 보게 됩니다. 그 옆의 새로운 로봇도 보게 되고요. 유리창을 통해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로 '로봇'은 '개'에게 사진의 존재를 알리려고 해요.
그리고, 달라진 자신의 몸을 통해 그와 함께 들었던 추억 가득한 음악을 선사합니다. 전 이 장면에서 진짜 울컥했어요. 어디선가 들리는 음악에 '개'는 반응했고, '로봇'도 다른 공간에 있지만 그와 한마음으로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그들은 헤어졌지만, 이때의 헤어짐은 이전의 무기력한 상실과는 달랐죠.
이 작품을 보면서, 제일 크게 다가온 건 상실에 대처하는 자세와 배려였어요. 여러 감정들이 섞여있지만, 과거와 현재 모두에 속할 순 없는 현실을 알기에, 현재에 충실하면서 과거에도 마음을 다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달까. 울컥하게 만드는 장면들도, 애달프게 만드는 장면도, 미소를 짓게 하는 장면도 많았고요.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은 다정한 행동으로 전달되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그런 마음을 아끼지 말고 말과 글, 행동으로 많이 표현하며 살았으면 좋겠단 생각도 하게 되었고요.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한 분이라면, 꼭 놓치지 않고 보길 바랍니다.
파코 로카(PACO ROCA, 1969, 스페인)는 사회적 이슈를 그래픽 노블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가입니다. 『주름(ARRUGAS)』은 2007년 바르셀로나 만화 페스티벌 최우수상을 받으며 작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으로,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노인들의 삶과 알츠하이머병을 녹여낸 수작이죠. 『주름(ARRUGAS)』 단행본에는「주름(ARRUGAS)」과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등대지기 노인과 군인 청년의 우정을 그린 「등대」가 두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 역시 우연히 알게 되었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본 후에 애니메이션을 봤어요. 왜 진작 몰랐을까 싶었을 정도로, 와닿는 지점이 많았습니다. 우린 모두 언젠간 노인이 되잖아요.
이 책은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반전이었어요. 책을 읽고 싶다는 자극을 아주 강하게 불러온 장면이었죠. 주인공의 병세가 심각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충분히 심어줬거든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전직 은행장 출신 에밀리오는, 아들 내외의 손에 이끌려 요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요양원에 도착한 에밀리오는 룸메이트인 미겔을 만나고, 그의 안내로 예전 라디오 방송 진행자로 자기가 들은 말만 따라 하는 후안, 1953년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딴 레나토, 알츠하이머 환자인 모데스트와 그의 부인 돌로레스 부인 등 요양원 사람들도 만납니다. 이때만 해도 에밀리오는 자신의 병세를 인지 못해 다른 노인들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았죠, 바쁜 자식들이 자신을 귀찮게 여겨 요양원에 왔다고 생각했거든요.
에밀리오는 요양원 노인 가운데 가장 의욕적이고 건강해 보이는 룸메이트 미겔을 통해 요양원 생활에 적응해 갑니다. 미겔은 요양원 노인들에게 말 사기를 쳐서 금전 이득을 취하는 사기꾼이었지만, 에밀리오에겐 든든한 지원자였죠. 그러다 간호사의 실수로 자신이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후 하루하루 살얼음판인 요양원 생활이 이어집니다.
사실 요양원엔 에밀리오가 가고 싶지 않은 층이 있었어요. 바로 요양원 2층. 이곳은 자기 몸을 스스로 추스르지 못하거나 치매, 정신분열증,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노인들의 병동이거든요. 2층에 올라가는 순간 인생이 끝났다는 인식이 요양원 내에 만연하게 퍼져 있었죠.
그래서 에밀리오는 룸메이트인 미겔의 도움을 받아 필사적으로 버텨냅니다. 하지만 점점 갈수록 상황은 악화되었고, 결국 에밀리오도 2층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작가는 그의 친구 디에고의 아버지인 에밀리오 씨가 앓고 있는 알츠하이머에 대한 이야기와 자존심이 무척 강한 자신의 어머니가 보행용 지팡이를 처음 구입하고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요. 그리곤 친구 부모님을 비롯해 연세 드신 친척들과 주변인들의 일화를 수집합니다. 책 속 등장인물 중 화성인들이 쫓아다니는 게 무서워 혼자 있기 싫어한 할머니는 살바의 고모님 이야기였고, 하찮은 물건들을 모았다가 요양원에 찾아오는 가족들에게 선물하는 할머니는 이스마엘과 우고의 어머니, 알츠하이머에 걸린 남편의 손을 항상 잡고 계시던 이웃집의 돌로레스 할머니, 육상 경기 우승자였던 분도 모두 그렇게 수집된 실제 사례입니다.
책 속엔 요양원에 거주하는 노인들의 다양한 모습이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알츠하이머에 걸린 남편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간 아내 이야기가 제겐 인상적이었어요. 그들은 60년 전 처음 만난 이후 한시도 떨어져 본 적 없는 금슬 좋은 부부였죠. 알츠하이머에 걸린 남편이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아내는 남편을 떠나지 않고 살뜰하게 보살폈고,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남편의 병세가 깊어짐에 따라 머뭇거림 없이 요양원 2층으로 함께 올라갑니다. 반대 경우도 나옵니다. 아내가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다른 이를 남편으로 착각하고 남편 앞에서 다른 이에게 애정을 듬뿍 보이죠. 남편은 그저 묵묵하게 그런 아내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고요.
인상적인 대사도 여럿 등장합니다.
"아무튼 당신은 늙는 거에 너무 부정적이에요."
"그야 당연하지, 이 사회의 퇴물이 되는 거니까." "늙는다는 건 심한 농담과도 같지."
"자식 놈들은 외출할 때나 학교에서 애들 데려올 사람이 없을 때만 우리를 찾아와. 그마저도 못 하게 되면 이런 요양원에 처박아 두고 신경도 안 쓰려고 하고."
"그런 말 말아요. 우리 애들은 날 좋아해요. 난 자식들 편하게 해주고 싶어서 여기 있는 거예요. 난 애들한테 짐 되기 싫어요. 원래 인생은 그런 거예요."
"사람이 늙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늙었다고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아요. "
"우리를 늙은이라 부르지 마세요. 그런 말을 들으면 말라비틀어져 가죽만 남은 기분이 들어요. "
"우리를 어르신이라 불러주세요. "
이외에도 이 책은 요양원에서 머무는 노인들의 현실적인 일상을 담고 있어요. 그 모습이 우리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는 점에서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죠. 예전에 서울에 있는 한 노인복지관에서 치매 방지를 위해 진행하는 체조에 참여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간단해 보이지만, 그 간단한 동작도 어렵게 느끼는 경우도 봤고요. 노년을 건강하게 지내고 싶단 마음으로 여러 활동들을 건강하게 하고 계신 분들이 제 주변에도 많이 계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에 찾아오는 병마를 모두 피해 갈 수는 없는 게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원치 않아도 경험하게 되는 건강하지 않은 노년과 노화, 죽음 앞의 존엄, 젊은 날의 추억, 가족, 친구 등 우리가 거쳐갔거나 현재 연결되어 있는 여러 상황과 관계들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누구나 겪게 될 이런 일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대처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죠. 읽다 보면 막연하게 때론 또렷하게 와닿는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책을 읽은 후엔 2011년에 발표된 Ignacio Ferreras 감독의 애니메이션 《 노인들, WRINKLES 》도 꼭 봐주세요. 책과 다른 결말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럼,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