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공간이야기
오랜만에 외출을 했습니다.
굳이 외출이라 적은 이유는, 일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방문지가 있어서죠.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어디에서 뭘 먹는 일도 참 부담스러운 요즘이라 가급적 혼자 일정대로만 휙 돌고 옵니다. 해결할 일들을 몰아뒀다가 한 번에 움직이다 보니 그래도 한 번은 밥을 먹게 되고 추운 날씨에 따뜻한 음료도 손에 들고 다니는데, 어디 앉아서 마실 곳이 없어서 걷다가 적당한 곳을 찾으면 한 번에 원샷으로 마무리하죠. 좋아하는 전시도 공연도 대부분 멈춰있지만 그래도 새해가 되고 여기저기 기대할 만한 소식들이 들려와 마음에 희망 씨앗이 자라고 있어요. :)
날은 춥고, 코로나는 걱정되고, 그래도 어디든 가고 싶고.
저는 가족이랑 함께 있어서 그나마 몇 마디 대화라도 나누지, 혼자 생활하는 분들에게 지난 1년은 너무 적막하고 적적했을 거 같아요. 미디어에 익숙한 분이라면 그나마 온라인에서 즐거움을 찾았겠지만 그마저도 지겨워질 때가 오잖아요. 근처에 산책로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환경이 주변에 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오늘은 주변 산책로가 있어 원하는 만큼 걸을 수도 있고 전시로 문화생활도 할 수 있는 곳을 소개드립니다.
사비나 미술관은 1996년 개관, 2002년에 제1종(전문)으로 등록된 사립미술관입니다. 2018년 '은평구 내 첫 미술관'으로 재개관했어요. 인사동에서 시작해 2002년 안국동으로 옮긴 뒤 16년 만에 은평구에 새 터전을 열었는데, 번듯한 건물을 보니 이사 잘했다 싶더라고요 괜히. 현대미술(융복합)을 주로 다뤄 안국동 시절에 종종 가던 곳이었는데 주변에 연계해서 볼 다른 미술관이 없다 보니 은평구로 옮겨간 후로는 뜸하게 되더라고요.
사비나미술관에 가본 분은 알겠지만 정말 랜드마크가 될 수밖에 없는 외관입니다. 위치도 그렇고요. 십자 교차로 한편에 삼각형 건물이 우뚝 서있거든요, 누가 봐도 미술관스러운. 게다가 산세 좋은 북한산 자락 아래 개천이 길게 흐르고 그 길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주변이 모두 아파트예요. 근처 사는 친구가 생활환경 관련 이런저런 썰을 풀어줬는데 생각보다 자연친화적인 동네더라고요, 편의 시설도 적절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집은 산 어귀 동네라 어느 정도의 생활상 불편은 그냥 친구 삼아 지내고 있거든요. 더 나이가 들면 이 불편함을 못 견딜 수도 있겠지만... 그전엔 집을 살 수 있겠죠? 어쩐지 웃픈 대사네요.
어쨌거나 코로나임에도 이곳은 다행히 휴관 없이 전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국공립 시립미술관들이 다 임시 휴관 상태라 선택할 수 있는 전시관은 대부분 유료인데, 그마저도 수량이 많은 편은 아니라서 특정 갤러리를 방문하거나 옥션 프리뷰 참관이 아니라면 미술작품을 원화로 보기가 어렵잖아요 요즘은. 대신 각 홈페이지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서 VR로 소스를 제공하지만 여의치 않을 때도 많고, 뭔가... 와 닿지 않아요.
확실히 공간이 주는 힘이 있어요. 작품이 편해야 사람도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대상과 목적에 맞게 처음부터 설계되고 지어진 곳에서의 감상은 늘 즐겁습니다. 온습도가 적절하게 유지되는 실내, 높은 천고, 안정적인 벽체, 소음이나 진동으로부터 위치, 활용도 및 성능이 괜찮은 조명, 작품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수장고... 대략 이 정도의 물리적 간섭만 이뤄지면 나머지는 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들이죠. 적고 나니 제가 나열한 것들을 소화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있네요, 안정적인 재정과 인력. 하지만 대안공간이나 소규모 갤러리 중에도 꽤 창의적으로 공간을 활용하고 있는 곳들이 많습니다. 나중에 몇 군데를 모아서 소개해볼게요.
사비나미술관은 공간 종합건축사무소에서 설계를 담당했어요. 건축면적 1740.23 m2 (526.42평)의 삼각형 형태인데, 건축물 소개에 ' 삼각형은 창의적, 역동성, 변화, 교류, 소통, 신성한 삼위일체를 상징한다' '삼각형 외벽은 흰 벽돌, 내벽은 노출 콘크리트, 창문이 거의 없는 개방성과 폐쇄성이 융합된 건축물에 융복합과 혁신을 지향하는 사비나미술관의 미션 mission 정체성을 담아 설계했다'라고 적어두었죠. 전체 5층으로, 삼각형 면의 한쪽으론 넓은 도로가 다른 한쪽으론 개천을 따라 산책로가 나 있어요. 건물도 스타일리시하지만 건축물 안에 소박하게 구획된 공간들이 별미를 제공합니다.
1층은 안내 데스크와 카페, 2·3층은 전시실, 4·5층은 전시, 학예업무, 아카데미(이벤트)를 진행하는 공간입니다. 구조는 단순한데, 내부의 본 전시 작품 외에 미술관 내외부 전관에 AA 프로젝트(Art &Architecture Project) 관련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어 공간을 복잡하게 만들어주죠.'Art &Architecture Project : 공간의 경계와 틈'은 '자연친화적인 사비나 미술관 건축물의 환경적, 건축적 특성을 미술가와 건축가가 시공 초부터 함께 탐구하여 총 8점의 공간 설치작품으로 선보이는 협업 프로젝트'라고 소개되었는데요, ' 공간과 빛, 구조와 동선을 함께 연구하고 탐색한 결과물을 선보이는 실험적인 프로젝트이자 미술과 건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전반적으로 다 좋았지만 특히 황선태(1972-) 작가의 <빛이 드는 공간>(2018)은 실제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작품에서 나오는 빛의 조화가 감쪽같아서 '정말 설치 잘했다~ '싶더라고요.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작업이지만 여기서 보니까 더 반가웠다는.
참, 입장 시에 일반 입장권 대신 띠 형식의 입장권을 팔목에 채워주는데요, 가본 지 오만 년도 더 된 놀이공원 생각이 나더라고요 ㅎㅎ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은 5층입니다. 일단 북한산의 공기를 마실 수 있는 확 트인 위치가 너무 좋고요, 설치 작품들도 마음에 들어요. 미술관 안내서에는 루프탑을 명상의 공간이라 명명했던데, 날만 더 따뜻해지면 햇빛 받으며 앉아있기 좋겠더라고요. 여기도 몇몇 작품이 있는데 그중 저는 세계 곳곳에 인공 달을 설치하는 작업으로 유명한 레오니드 티쉬코브 Leonid Tishkov(러시아)의 초승달 작품인 <The stairs to the moon>(2019)과 비연속적인 사각 틀(문)을 자갈길 위에 세워둔 박기진(1975-) 작가의 <통로(A PATH)>(2018)가 인상적이었어요. 공간과 잘 어울리는 설치이기도 하고 또 각도마다 인상적인 컷이 나와 사진 찍을 맛이 나거든요. 게다가 레오니드 티쉬코브의 '초승달'은 하얀 건물 위에 파란 하늘을 배경 삼고 있어, 밤에 스치듯 지나면서 보면 정말 달이 내려와 걸려있다고 충분히 착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1층부터 5층까지 실내 계단을 통해 관람하셨다면 내려올 땐 외부 계단을 이용해 보세요. 물론 매 층마다 내부로 연결되는 문이 있긴 하지만 늘 열려있는 건 아니라 혹시 잠겨있으면 다시 올라가야 하는 수고로움은 있을 수 있으나, 숨겨진 명당들이 있어 다른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볼 수 있어요. 밖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근사한 곳도 있고요. 딱 한 사람만 서있을 수 있는 삼각형 꼭짓점의 외부 공간이 있는데, 해보진 않았지만 잠깐 마스크를 내리고 숨을 깊게 들이시면 좋겠더라고요, 겨울 공기가 생각보다 달잖아요.
현재 이곳에선 에콰도르 국민화가로 불리는 오스왈도 과야사민Oswaldo Guayasamín(1919-1999) 전시가 진행 중입니다. 라틴아메리카의 피카소로 불리는 오스왈도 과야사민은 에콰도르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문화영웅으로 칭송받는 작가라고 합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에콰도르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는 해외에 반출할 수 없다고 하죠. 이번 전시는 2019년도 과야사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한국과 에콰도르 양국 간 문화교류 활성화 차원에서 지난해부터 추진해 온 전시로, 사립미술관 공모를 통해 장소를 선정했어요. 보시려면 꼭 홈페이지 사전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남미 미술, 어렵지 않을까'라고 여길 수 있는데,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 (1886-1957, 멕시코),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 페르난도 보테로 Fernando Botero (1932-, 콜롬비아) 등 우린 이미 남미의 여러 화가들을 알고 있답니다. 미술관 설명자료, 온라인 도슨트도 제공되니 혼자 감상하기에 어렵지 않고요, 이번 특별기획전과 연계해 12월 ‘평화를 위한 절망의 외침, 과야사민의 예술과 철학’을 주제로 진행된 온라인 전문가 토론회도 사비나미술관 누리집과 유튜브 채널 등에서 서비스되고 있습니다. 실내 영상 자료들도 잘 된 편이고, 내부 인원도 20명으로 한정 지어서 여유롭게 볼 수 있어요, 단지 살짝 춥습니다.(저는 그랬어요)
초기작은 물론 차별과 핍박을 당하는 민중의 모습과 그 가해자를 고발하는 전성기 시절의 유화, 드로잉, 수채화 원작 등 주요 작품 89점을 시기 구분에 따라 2,3층에 집중적으로 배치했고, 4층에는 <에콰도르: 네 개의 세상>이란 주제로 간소한 오브제들 그리고 자연, 문화환경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사진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늘 그런데, 사진을 아무리 잘 찍어도 작품이 평면적으로 보여 원화의 느낌이 안 살아요. 질감이 중요한데 그게 전혀~. 이전에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들을 보아왔던 터라(동일 작가의 작품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새롭지는 않았는데요, 확실히 좋아요.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잘 그렸다' 란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 전달이 분명합니다. 지배 계급의 폭력성을 드러낸 대작 <펜타곤에서의 회의>(1970) 연작, 남미와 스페인 전역을 여행하며 그곳에서 겪은 민중들의 불행을 그린 <눈물 흘리는 여인들>(1963-1965), ‘어머니’를 그리며 인류애를 제시한 <어머니와 아이>(1982) <온유>(1989) 등 작가의 의도는 얼굴 부분(특히 눈)과 손을 통해 집중적으로 표현되었고, 그가 영향을 받은 피카소, 엘 그레코, 고야의 분위기도 작가의 개성 있는 화풍 속에서 미묘하게 전달됩니다. 전쟁을 겪은 예술가들의 표현은 비슷비슷한 분위기가 있어요, 색채나 묘사 방식, 구도 등의 형태로 예술가들에게 형성된 공감대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전쟁을 겪진 않았지만 인간 내면의 모습을 유사한 화풍으로 그려내는 다른 작가들도 있으니 서로 비교해서 볼 기회가 있으면 더 좋겠죠.
다른 이유 필요 없이 '어떤 점이 이 사람을 '국민화가'로 만들었을까'를 탐구할 목적으로 미술관을 찾아도 좋지 않을까요?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아가듯 작품을 보다 보면 답을 얻을 테니까요.
여러 분야가 작년에 비해 그래도 안정되어가겠지만, 지구촌 사회의 일원으로서 '코로나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외치기엔 올 1년도 부족해 보입니다. 뭐 그렇다고 우리 인생이 멈춰있는 건 아니니,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고 스스로 방역 철저히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자고요. 아무도 보상해 주지 않잖아요, 지난 우리 시간들은.
오늘도 즐겁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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