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공간이야기
《 SpaceK 》 옆 《 서울식물원 》 강서구 마곡동 (feat. 헤르난 바스)
'미술관 옆 동물원'이란 영화가 있죠.
1998년 영화인데, 본지 오래라 디테일이 다 생각나진 않지만 영화 제목이 귀에 익숙할 만큼 사랑을 많이 받은 작품입니다. 각기 다른 사랑의 형태를 다룬 로맨스 영화로, 극 중 춘희(심은하)와 철수(이성재)가 서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다 시나브로 서로에게 섞여가며 서로를 변화시키는 존재가 되죠.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2010)처럼 춘희와 철수는 미술관과 동물원 같은 성향의 사람으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둘이 함께 만들어 낸 하모니가 영화 속 시나리오이자 영화 제목인 「미술관 옆 동물원」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미술관 옆(도보거리)에 동물원은 아니지만 식물원이 있어서 제목을 뭐로 할까 생각하다가, 이 영화가 생각나서 적어봤어요.
마곡 산업단지로 유명한 마곡지구 문화공원 내엔 코오롱그룹이 만든 문화예술 나눔 공간 '스페이스 K_서울'이 있습니다. 2020년에 개관했어요. 개관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코로나 여파도 있어서 근처 사는 분들이 아니라면 아직 못 가본 분들이 더 많을 거예요. 약 600평(연면적 2044㎡) 부지에 약 105억 원을 들여세운 지하 1층 지상 2층의 미술관인 스페이스 K_서울은, 20년간 자체 운영 후 서울시로 귀속될 예정이라 현재는 서울시 기부채납 상태라고 합니다.
'메세나 mécénat'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텐데요, 우리나라에도 1994년 발족한 한국기업 메세나협의회가 있어 기업과 문화 · 예술 · 과학 · 스포츠 단체들을 연결하는 일을 하고 있죠. 코오롱그룹 역시 예술을 후원하고 지역민과 공유하는 대표적인 메세나 기업으로, 1998년부터 과천 사옥에서 지역민을 위해 클래식 · 뮤지컬 · 마술쇼 등을 공연하는 ‘코오롱 분수 문화마당’을 약 10년간 진행했고, 2009년 과천 타워 로비에서 개최한 이벤트성 전시를 기점으로 2011년 과천 본사 로비에 ‘스페이스 K’를 개관해 시민들이 미술 작품을 무료 관람할 수 있도록 했어요. 서울 강남의 코오롱모터스를 비롯해 광주, 대구, 대전 등지에도 전시관을 마련해 총 152회 전시· 437명의 작가를 후원했는데, 2018년 마곡 산업단지에 '코오롱 원 앤 온리 One&Only 타워'를 건립하면서 지역민들을 위한 공공기여 형식으로 오늘 소개할 ‘스페이스 K_서울’을 건립했죠. (참고로 코오롱 원 앤 온리 타워는 시카고 아테니엄 건축디자인 박물관 주최 ‘국제 건축대상 2020’에서 기업 업무빌딩 Corporate Office Buildings 부문 수상작입니다.)
미술관이 위치한 곳이 한다리 공원(마곡 컬처 파크)인데요, 3면이 도로에 면한 공원 부지 주변으론 연구 · 업무 및 상업시설이 주를 이루죠. 지하철역도 멀지 않고 서울 식물원도 도보거리 내에 있습니다. 전혀 미술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위치이긴 한데 또 너무 잘 어울리는 자리선정이기도 합니다. 가보면 제 말을 이해하시겠지만, 공공기관으로서의 미술관이라 가능한 위치였다고 밖엔 볼 수 없어요.
코오롱그룹 이웅열 명예회장(1956-)의 부친인 이동찬(1922-2014) 선대 회장은,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준 1995년 이후, 그림에만 몰두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해요. 서울 종로구 통의동 코오롱 사옥에 작은 화실을 마련해 그림을 그리고, 팔순 기념 때도, 88세 미수 때도 자신의 그림으로 전시를 열었을 정도로, 그림에 진심을 다했죠. 그만큼 현대미술 메세나에도 적극적이었대요. 아들 이웅열 회장은 영화광이며 만능 스포츠맨으로 사옥 주변의 지역민과 예술의 기쁨을 나누고 싶어 앞서 얘기한 여러 문화 사업들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 한국메세나협회의 메세나인상을 수상하기도 했어요. 오너 가족 중에 미술 전공자도 있지만 스페이스 K 운영 등 메세나 활동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쨌든 상대적으로 문화 인프라가 부족한 서울 서남부 지역에 현대미술관이 생겨 더 반가운 건 사실입니다. 잘 알려진 기업이 든든한 후원자이니 분명 좋은 전시들이 많이 소개될 테니까요.
높이 솟은 건축물들 사이로 낮게 포진한 스페이스 K_서울의 건축·설계는 2014년 제14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조민석 매스스터디스 소장이 맡았어요. 상하이 엑스포(2010) 한국관 등 설계, 2011년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 전시 공동 기획 등의 이력이 있고, 현재는 현상설계 당선작인 서울 시네마테크(몽타주 4:5), 당인리 문화공간(당인리 포디움과 프롬나드), 양동 구역 보행로 조성 사업(소월 숲)과 연희 공공 주택 복합시설을 맡아 진행 중이라고 하죠. 부드러운 곡선과 호(弧, arc)가 주 건축디자인으로 주변 녹지와도 잘 어울립니다. 반 이상을 정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옥상에 서보면,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라는 것에 한번 놀라고, 주변 높은 건축물들에서 굽어볼 수 있는, 그야말로 모든 시선이 모이는 곳이라 또 놀랍니다. 정말 말 그대로 완전히 개방되고 열린 공간이거든요.
내부는 깔끔합니다. 다양한 변화가 가능하도록 비어져있거든요. 전시 가벽을 세워 전시 때마다 동선의 변화를 주는 구조라 회화뿐만 아니라 소화할 수 있는 예술 영역이 무궁무진하고, 3 개의 천창을 통해 확산된 간접 자연광이 자연스럽게 유입되지만 전혀 관람에 방해가 되지 않아요. 천정고 역시 3.3m에서 점진적으로 높아져 최대 9.2m까지 올라가 변화무쌍한 현대미술 연출이 가능한 공간 조건을 충족하죠. 2.5m 간격의 천정보 모듈을 기준으로 자유로운 조명 배치가 가능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시 벽체들을 원하는 대로 배열할 수 있어서 오히려 고정적으로 구분을 진 것보다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겠더라고요. 개관 소개 기사에는 '마곡 산업단지의 특성을 고려해 다양한 기술을 융합한 현대미술의 경향을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출 예정'이라고 되어 있던데, 충분히 그 이상을 소화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곳에선 현재 개관 후 2번째 기획전인 미국 마이애미 출신 쿠바계 화가 헤르난 바스 Hernan Bas(1978-)《모험, 나의 선택 Choose your own adventure 》(2021.02.25-05.27) 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2007년부터 2020년까지의 작업 20여 점을 선보이고 있죠. (유료 성인 5천 원) 도슨트도 진행하고 있어요.
《모험, 나의 선택 Choose your own adventure 》은 1980-1990년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누린 책 시리즈의 제목으로 이 책은 독자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다르게 전개되는 구조라고 하죠. 헤르난 바스의 작품은 미소년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그들이 겪는 상황과 모험은 작가가 평소에 관심을 가져온 고전문학이나 종교, 신화, 초자연주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매표소 앞엔 작가에게 영감을 준 책들이 전시되고 있고요.
작품 수가 많은 건 아니지만 제작연도대로 보다 보면, 모호하고 존재감이 미미했던 청년이 점점 화면 속 주체가 되어가는 성장 드라마 같은 느낌도 있고, 작품의 키워드를 추측할 수 있는 제목과 힌트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어 찾아보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우울하지 않아 좋고 화면이 시원시원해서 좋더라고요 저는. 재미있는 요소가 많아요 그림에.
이 전시 이후엔 영국 개념미술 작가 라이언 갠더의 전시도 예정되어 있다고 하니 앞으로도 쭉 눈여겨보면 좋을 전시공간입니다. (현대미술만 보는 게 아쉽다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겸재 정선 미술관도 추천드려요~)
그래도 뭔가 이것만으로 아쉽다면, 미술관 옆 식물원에 들러보세요. 느긋한 도보로 10분이면 도착합니다.
이미 여러 보도를 통해 아시겠지만, 2019년 개원한 도심 보타닉 공원으로 정원과 공원이 합쳐진 독특한 거대 식물 연구·보호 단지죠. 축구장 70개 크기의 부지가 다 식물 관련 공간이니까요. 용산 기지도 용산공원으로 탈바꿈하는 작업을 진행 중인데, 첫 국립 도시공원인 용산공원이 생기면 마곡에 있는 시립 서울식물원과 함께 서울시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장소로 더 각광받지 않을까 싶어요. 현재도 용산가족공원은 시민공원으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이며 미군 기지며 그 일대가 다 공원이 되면 영국의 하이드파크나 뉴욕의 센트럴파크가 부럽지 않을 겁니다, 분명.
서울식물원은 열린 숲·주재원· 호수원· 습지원 4곳으로 크게 나눠지는데 하이라이트는 주제원과 온실입니다. 주제원은 여덟 가지 테마로 야외에 꾸민 한국식 정원이고, 온실은 열대와 지중해 12개국의 식물을 전시하고 있는 실내공간이에요. 다른 곳은 무료이지만 주제원과 온실은 통합권(성인 5000원 제로 페이 결제 시 30% 할인)을 구매해야 볼 수 있는데, 생각보다 넓고 식물종도 다양해서 투자가 아깝지 않습니다. 따뜻하고 걷기도 편안해 남녀노소 함께 하기에 무리가 없어요. 지상에서 관람을 마친 후엔 스카이워크라는 하늘다리로 지상 식물들을 부감할 수 있는데, 각도가 달라지면서 주는 신선함이 있습니다. 여기저기 신경을 많이 쓴 조경들과 설치물도 눈에 잘 들어오고요.
게다가 편의시설도 잘 되어 있어서, 그냥 하루 꼬박 놀기에도 좋습니다. 카페, 푸드코트는 물론 식물 관련 전시관, 도서관, 기프트숍 등 다양하니까요. 코로나로 아직 좀 썰렁한 감은 있지만 오히려 사람이 적어서 더 풍족하게 누릴 수 있어요. 야외 정원에 아직 푸른 기운은 없지만 온실과 부속기관들에서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으니, 미술관 갈 때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식물원 갈 때 미술관을 같이 보셔도 되고요.
2022년에는 서울식물원과 바로 인접한 곳에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LG아트센터도 개관 예정이니, 2022년 이후로는 이 마곡지구가 문화예술의 또 다른 핫스폿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https://www.spacek.co.kr/index.do
https://www.kolon.com/news/newsView.do
https://botanicpark.seoul.go.kr/front/ma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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