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tngineer Dec 06. 2021

자율규제는 '규제 없음'과 같은 말

애초에 기대조차 안 했지만 게이머 우롱이 도를 지나쳤다.

지난달 11월 29일 국민의 힘 이용 의원이 게임법 전부 개정안을 발의했다(가 며칠 만에 철회됐다. 개정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위의 기사 참조). 사실 게임법 전부 개정안은 지난 2020년 12월 더불어민주당 이상헌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이다. 법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소/인디 게임사업자 지원

등급 분류 간소화

게임 사용자가 제기하는 정당한 의견과 불만 처리 의무화

경미한 게임 내용 수정 신고 제외


전체적인 골자는 문제가 되는 부분이 없지만 '확률형 아이템'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 힘의 쟁점으로 남아왔다. 더불어민주당은 확률형 아이템의 존재를 규정하고 확률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사업자를 처벌하는 법안 내용을 제안했으며 게임법 전부 개정안에 해당 내용을 포함시키려 했다. 해당 법안이 만들어진다면 게이머들은 NC소프트나 넥슨으로 대표되는 '확률형 게임'이 유발할 피해를 어느 정도 사전 차단할 수 있다(물론 게임 개발사들은 늘 그래 왔듯이 교묘하게 법을 피해 갈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어느 저명했던 기업인의 말대로 '법은 느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의 힘은 확률형 아이템을 규정할 생각도 규제할 생각도 없었다. 야당은 확률형 아이템을 별도로 분류하지도 않았고 '기업의 자율 규제'를 법안에 포함시켰다. 한 마디로 확률형 아이템 규제를 위한 법적 근거는 만들 생각이 없고 기업이 알아서 '잘' 하란 말이 된다. 만약 이 법안이 만들어진다면 확률형 아이템에서 피해를 보게 되더라도 게이머는 기업에 항의할 법률적 근거를 아예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는 자율적으로 잘 규제해 왔다'는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자율규제'라니? 심지어 그 법안을 제안한 국민의 힘 의원 이름에 셧다운제 폐지에 핏대 세우셨던 '허은아' 의원도 있다. 실효성이 없다며 '게이머의 권리'를 주장했던 사람이 당당히 게이머의 권리는 뒷전인 법안을 발의했다(덤으로 게임 산업과 게이머를 탄압할 목적의 게임 중독법을 2013년 공동 발의했던 김도읍 의원도 자율 규제 법안에 참여하셨다). 물론 며칠 안가 야당은 '일시적으로' 그 법안을 철회다. 젊은 층 중심 게이머들의 반발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일시적으로' 철회했다. 한 때 게이머들의 권리를 위해 확률 조작을 감시하는 법안까지 발의했던 정당에서 나온 법안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당시 법안을 발의했던 국민의 힘 하태경 의원은 허은아 의원의 자율 규제 법안 발의를 옹호하며 좋은 동지애를 과시했다).

눈치 보기용으로 잠시 법안을 철회했으나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그 결과에 따라 해당 법안을 다시 꺼내 들 것이다. 특별할 거 없는 흔한 글쟁이이지만 이건 예언할 수 있다. 국민의 힘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면 확률형 아이템 자율 규제를 담은 법안을 다시 발의해 확률형 아이템에서 막대한 수익을 뽑아내는 기업의 입장을 대변할 것이다. 물론 '승리했을 때'의 이야기이긴 하다. 젊은 남성 게이머들의 뒤통수를 치는 강력한 헛발질로 청년층의 일부는 이미 그들에게 등을 돌렸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알게 모르게 그들을 떠날 것이다. 선거에서 패배한 후에야 등을 돌린 게이머의 숫자를 세보며 청년들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며 다른 법안을 제시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 또한 일시적이겠지만.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당이 잘못됐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게이머의 권리도 있지만 기업도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져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기업의 입장이 게이머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명백히 문제다. 그동안 게이머들은 확률 조작으로 의심되는 일로 분노했고 때로는 경제적인 피해까지 입었다. 의심은 갔지만 그 진실은 제대로 밝혀진 적이 없다. 법적 근거라는 이름의 규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나는 셧다운제 폐지의 무쓸모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아래 링크 참조). 셧다운제는 이미 죽은 시스템이고 게이머나 기업에게 큰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국민의 힘이 발의한 게임법 전부 개정안 소식을 듣고 나니 셧다운제 폐지는 사용자가 아닌 기업을 위한 행동이었다는 생각까지 든다. 죽은 시스템을 폐기하면서 게이머를 위한다는 명분을 세우고 기업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이런 생각은 의심이다. 하지만 그들은 의심 가는 행동을 했다. 게이머의 신뢰를 저버렸다. '자율 규제'는 규제 철폐와 동음이의어다. 그토록 오랜 시간 게이머의 권리는 보호받지 못했는데 '자율 규제'라는 이름으로 기업으로부터 사용자 보호 의무를 아예 없애주려 한다. 이건 게이머에게도 좋지 못하지만 게임 산업에 대한 게이머의 신뢰를 깨뜨려 산업 근간에 악영향을 주는 최악의 법안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게이머를 생각하던 국회의원 분명 존재한다. 더불어민주당의 이상 의원이 대표적이다.  이상헌 의원은 국민의 힘이 게임법 전부 개정안에 확률형 아이템 자율 규제를 포함시켰을 때 페이스북을 통해 게이머의 힘을 끌어 모았다. 악성 법안 철회를 이끌어 낸 것은 적극적으로 항의에 참여한 게이머들이지만 이상헌 의원의 기여는 절대 외면할 수 없다.

국민의 힘이 자율 규제를 발의했을 당시 이상헌 의원 페이스북. 보좌관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센스가 돋보인다.

이상헌 의원은 올해 국정감사에서 밸브(Valve)의 VR 신작 '하프라이프 : 알릭스'를 시연하며 NC 소프트의 리니지 W와의 게임 퀄리티를 비교하기도 했다. 게임 시연을 통해 비즈니스 모델 개발에만 집중하는 우리나라 게임 업계를 비판하는 발언을 남겼다. 본인의 지역구와 어떤 연관도 없으면서도 게임 산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왔고 게이머의 이익을 대변하는 발언과 법안 상정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동안 일관성 있게 게임 산업에 관심을 보이고 게이머를 위해 일해왔던 이상헌 의원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헌 의원과 더불어 최근에는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도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미공개 시 기업을 처벌하는 내용을 담은 게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상헌 의원 전에는 더불어민주당의 전병헌 의원이 있었다. 전병헌 의원은 게임쇼에 코스프레까지 해가며 참여할 정도로 게임 산업에 관심이 많아 여러 법안을 발의했고 게이머들의 호감을 샀다. 한 때 게이머들의 대통령이라 불리기도 했다. 불미스러운 일로 지금은 정계를 잠시 떠나 있지만 게임에 대한 우호적인 자세만큼은 언제나 일관적이었다.

리그 오브 레전드 캐릭터, 그라가스의 코스프레를 한 전병헌 의원. 전병헌 의원은 다양한 게임 캐릭터 코스프레를 했다.




최근 국민의 힘 윤석렬 후보 선거 캠프는 '게임은 4대 중독'이라며 중독 예방 관리 및 치료를 위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던 신의진 교수(전 국회의원)를 영입했다. 신의진 교수가 2013년 대표 발의했던 이 법안에 따르면 게임은 마약, 술, 도박과 함께 4대 중독 물질로 분류된다. 이 법안의 빠른 이해를 돕자면 이 법안은 게임을 마약과 동일 선상에 놓고 관리한다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한다. 게임 산업 종사자와 게이머라면 뒷목 잡을 내용이다(이 법안이 얼마나 최악인지는 따로 글을 한편 쓸 수 있을 정도이니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후에 필요하다면 생각 없이 만들어진 게임 관련 법안을 다루는 글을 쓸 때 자세히 다뤄보겠다). 이 당시의 임팩트는 정말 강력했기에 상당 수의 게이머가 신의진 의원을 안 좋은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다. '안 좋은' 이미지라는 표현을 썼지만 당시 게임 커뮤니티와 웹진에서 게이머의 분노가 넘실거렸다. 신의진 교수의 윤석렬 후보 선거 캠프 합류를 통해 게이머를 향한 윤석 캠프의 시선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저질 정치인의 표본처럼 손바닥 뒤집듯이 위기 탈출용으로 게임을 옹호하는 발언을 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상황에 따라 일시적일 것이다.


나는 게임업계 종사자이지만 그전에 한 명의 게이머다. 언젠가 나는 게임회사를 떠나겠지만 게이머로써 나의 인생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임 기획자인 나보다 게이머인 내가 더 중요하다. 최근 며칠간 야당이 만들어낸 일련의 상황은 게이머로서 절대 유쾌하지 않다. 불쾌하고 답답하다. 제발 부탁이다. 게이머, 청년을 위한다는 표면적인 언행은 좀 닥쳐주고 행동으로 보여주길 바란다. 페이커 옆에서 찍은 사진으로 본인 이미지 홍보했을 때는 뜻대로 되는 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게이머는 바보가 아니다. 뭐가 이득인지 손해인지는 그동안 겪어 온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간파해 낼 수 있다. 자율규제? 차라리 우린 게임하는 놈들한테 관심 없다는 발언을 해라. 적어도 위선적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허은아 의원님, 페이커는 본인 이미지를 위해 중요하고 게이머는 하찮습니까?




작가의 이전글 나에게 글쓰기가 쉽지 않았던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