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내 인연의 커다란 실타래를 푼 것은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한참 전에 알던 사람이었다. 7년, 8년 전에 페친이었다가, 내가 이혼을 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사람에 대해 불신하던 시절.
2,500명 정도 SNS에서 페삭을 한 일이 있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유는 단지, 아주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간관계가 소음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인연이라는 것이 참 얄궂기도 해서 4개월 동안 맡은 프로젝트에서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집에서 일만 할 때였다.
1차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명함만 주고받았고, 2차에서 그는 아내와 이혼을 해야 하는데,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이혼 소송에 대비해서 이혼전문변호사를 알아보던 차였다.
나는 막차에 쫓겨 그 이야기를 들은 게 겨우 10분이나 됐을까 말까 했던 차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가 말한 그런 상황을 듣지 못했다면 나는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 거고, 아무리 수십 년을 보아온 친한 지인들이 있다고는 해도, 이혼이라는 그런 개인적인 일을 그들과 상의하는지, 내가 아주 의아해하지 않았으면, 그는 내 기억에 남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두 번째 만남도 역시 몇몇 지인들 모임에서였고, 이혼을 앞둔 그가 그냥 편했다.
그도 내 사정을 알았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 무심코 던지는 내 말을, 그는 꽤나 신중하게 듣는 편이었다.
성격은 그렇지 않은 듯 보였으나 조용했다.
그때 나는 좀 급발진을 했던 것 같다.
내일이면 계약을 하고 편집장은 계약을 빌미로 난도질을 할 참이였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내가 쓴 책이 아닌,편집장이 쓴 책이 된다. 도저히 그 꼴은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대표에게 메일을 보내고 계약을 엎었다.
그때 나는 같이 욕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내 편이 하나도 없었는데 잠깐이라도 내 말을 들어주고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그는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달려왔고, 그동안 내가 쌓인 스트레스만큼 그에게 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 이후 우린 조금씩 친해지면서 아주 진지하게 그의 결혼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이혼에 대해서만큼은 선배인지라 아낌없는 조언을 했던 것 같다.
그는 생각보다 빠르게 이혼을 진행했고 이후 합의이혼으로 수월하게 정리가 되었다.
그는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른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업의 종류도 여러 가지, 성공한 사업이 더 많기는 했지만, 실패도 만만찮게 했던.
신용불량자까지 되어가며 지키려던 사업도 있었고, 이제는 사업도 20년 차가 넘어서 스타트업 컨설팅을 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기도 했다. 경험이 아주 풍부했다.
각각 20년의 결혼 생활을 마쳤고, 나는 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차츰 안정적인 생활을 하던 차였지만, 그는 이제 시작이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도 헤어져야 했고, 기르던 개와도 헤어져야 했다.
어떻게 든 가정을 지켜보려고 애를 썼지만, 역시 그의 이혼도 불가항력적이었다.
첫째 아이는 자신의 아이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의 아이라서 내 아이가 아니라는 소송을 해야 한다니……
그가 억울하지 않고 분노가 없었을까?
나는 아직도 그의 깊은 상처를 알 도리는 없다.
사실 예측도 할 수가 없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신, 그냥 옆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고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절대로 나로 인해 상처를 주거나, 그 어떤 아픔도 주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했었던 것 같다.
그는 내가 늘 자신을 보고 웃어주었다고 한다.
왜 그를 보면서 계속 웃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아마도 상처받은 사람에게 마추 칠 때마다 웃어 주는 것이 최선이었는지 모른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이유야 많겠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홍연이라는 말이 있다.
붉은 실로 이어진 인연을 뜻한다.
언젠가 맺어질 남녀는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로 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예측할 수 없는 인연의 고리들이 커다란 실타래를 만들어 내는 순간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딱 맞아야 일어날 수 있는 작은 기적 같은 것이었다.
너무나 확실하고 구체적인 이끌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때가 아니라면 우린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때 그 말이 아니었다면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이다.
말로는 설명하지 못한 운명의 이끌림이라고 밖에는 뭐라 설명하기 힘들다.
삶의 목표 없이 부표를 붙들고 떠 도는 느낌에서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이렇게 크게 안 도할 일인지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누굴 만날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삶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혼돈이기도 하며, 불행은 어느 날 내 무릎을 꿇리며 아프게 만들지만, 행복한 시간도 언젠가는 지나가며, 불행한 순간도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진리를 깨닫게 한다.
그 모든 순간이 기적이였다.